이상남 작가의 ‘네번 접은 풍경’ 연작 중 한 작품. 화면의 일부 이미지를 확대한 도판이다.
육순 넘긴 그의 화가 인생은 ‘기고만장’, ‘파란만장’으로 요약된다. 1970년대 말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돌아다녔다. 80년대 모더니즘, 민중미술 진영으로 미술판이 갈라지기 전 서울 신촌과 인사동에서 어울리던 당대 문제작가들이 동료, 선배였다. 문범강, 문범, 김용익, 최철호(최민화) 등의 동료, 이우환, 박서보 등의 대선배들과 어울리며 퍼포먼스, 해프닝, 전시 등을 벌였다. 일본의 젊은 전위 작가들과도 죽이 맞아 도쿄, 서울 오가면서 전시도 했다. <한글의 탄생>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 어문학자 노마 히데키가 그 시절 절친해진 친구다.
기죽고 못 사는 혈기방장 기질을 불태우며 미술판을 갖고 놀았던 이 작가는 81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 뒷골목 좁은 작업실에서 팔릴 그림을 그려내야 하는 생존의 고투를 십여년 겪었고 언어장벽에 시달리는 등의 간난신고 끝에 90년대 중후반 설치적 회화, 기계적 회화 등으로 명명한 추상그림들을 들고 한국 화단에 다시 나타났다.
서울 삼청동 피케이엠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재미화가 이상남(64)씨의 개인전 출품작들은 이런 곡절 끝에 만들어진 자취들이다. ‘네번 접힌 풍경’이란 제목의 연작들은 설계도면이나 거대한 기계장치의 부품 같은 도상들이 상하좌우로 맞물리고 복잡한 색면 색층 위로 풀려나온 인공적 스타일이 물씬한 그림이다. 전시장엔 1990~2000년대 깔끔하고 정돈된 색면에 기계적 상징도상들을 정연하게 배치해 시장에서 호평받았던 구작들과, 손작업의 흔적이 더욱 짙어지고 도상이 다소 복잡해진 신작들이 같이 나왔다. 신작들은 떨어져서 보면 오래된 누더기 포스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다가가면 테이프를 붙였다 잘라내 면을 만든 것처럼, 정교한 화면과 색층의 분할이 기계적 도상과 어울려 더욱 복잡하게 중첩된 이미지 구성을 보여준다. 수백개나 된다는 그림 속의 기계적 요소들과 이들을 다채롭게 배치하고 색면 위로 표출하는 그림 틀 자체에서 만만치 않은 작업 과정의 인고와 고충이 짐작되는데, 도미한 전후 풍운 많았던 작가의 삶 자체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세부 도상에 몰두하거나 비슷한 도상을 일일이 붓질하고 사포로 갈아 매끈한 화면을 만드는 과정은 한국 근현대미술 특유의 수작업 전통을 반영한다. 70년대 한국 추상회화의 사고방식이 밴 작업들을 계속 자신의 아이디어로 변용해온 작가의 특출한 필력이 강박적 욕망과 함께 느껴진다. 4월4일까지. (02)734-9467.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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