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찾은 불상’전에 나온 고려 초기께의 소조불상. 경북 예천 남본리 개심사터 유적에서 나온 것으로 나한상으로 추정된다. 주름진 미간에 입을 살짝 벌린 모습에서 수행자의 간절한 염원이 전해져오는 수작이다.
진열장은 불량품들 천지다. 온통 깨어지고 어그러지고 뒤틀린 굽다리접시, 발 등의 옛 토기조각들이 여기저기 켜켜이 쌓여 있다. 1500년 전 대구 지역에서 번성했던 옛 신라권 소국 압독국의 장인들이 토기를 굽다 실패해 버린 것들을 모은 것이다. 전시장에 들어온 토기조각들만 수천점. 그만큼 숱한 시행착오의 고통을 견디며 견고한 토기를 만들어냈다는 의미다.
지난해 11월부터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 마을, 시지’는 경주 황남대총, 천마총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왕, 귀족들의 부장품들을 선보이는 전시가 아니다.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구 시지동 일대에서 1990~2000년대 수십차례의 발굴조사로 드러난 4~6세기 이름 모를 장인들의 생산품과 조선시대까지 1000여년간 옛 마을의 다기한 생활유물들을 한가득 보여준다.
대구 수성구와 인근 경산까지 걸친 시지동 유적은 고대 마을 유적으로는 국내 최대급으로 4만점 이상 유물이 나왔다. 건물터와 유난히 후하게 부장품을 넣은 분묘는 물론 수로, 부뚜막, 온돌, 제례 흔적 등 고대인들의 일상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널무덤, 돌넛덜, 돌방무덤 같은 무덤양식의 변천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지동 유적의 전모를 처음 공개하는 이 특별전은 나온 유물만 1만점이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압도적인 물량에 휘둘리지 않고 전시를 보는 열쇳말이 있다. 4~5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토기 제작 혁명이다. 그 전까지 노천 작업장에서 800~900도의 저온으로 강도가 약한 와질 토기를 만드는 데 급급했던 장인들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1100도 이상에서 구워지는 단단한 도질 토기를 빚는 데 성공한다. 전시장은 이런 장인들의 생산 투쟁을 증언한다. 시지동 일대에서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토기 제작 과정의 노고가 여러 진열장 속의 불량품들과 완형품들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장인들이 주로 살았던 시지동 여러 마을의 두레박, 낫, 무덤 부장품, 농기구 등도 나왔고, 고려시대 등장한 수백벌의 숟가락과 금속제 용품 등도 진열장에 전시돼 시지동 인근의 옛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추체험할 수 있다.
시지동 유적은 1993년 아파트 택지개발 당시 업자가 영남대박물관에서 조사중인 유적지를 깔아뭉개는 참사가 벌어져 조사원이 포클레인을 직접 저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유적 파괴가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택지개발 전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 의무화가 정착된 계기가 됐다. 전시장엔 사건을 보도한 신문과 방송 영상, “역사책 한권이 통째로 뜯겨져 나간 느낌”이라는 유홍준 당시 박물관장의 회상문 등도 붙어 있어 그 시절 절박했던 상황도 차분히 살펴볼 수 있게 했다.
‘마침내 찾은 유적 고대 마을, 시지’전에 나온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조각들. 옛 압독국의 장인들이 토기를 굽다 실패해 버린 것들을 모은 것으로, 당시 장인들의 작업 흔적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유물들이다.
이 전시장 옆 작은 방에서 진행중인 테마전 ‘흙에서 찾은 불상’에는 흙으로 빚은 고려 초 소조불상의 낯선 걸작들이 등장한다. 2000년대 초 경북 예천군 남본리 개심사터에서 발굴한 두 소조불상이 나왔는데, 수행자의 고뇌를 담은 비장한 풍모가 울컥한 감동을 안겨준다. 고승 혹은 나한상으로 추정되는 두 소조불은 모시포에 진흙을 채워넣어 붙인 뒤 다시 진흙으로 덮어 모양을 빚는 기법을 써서 만들었다. 고르지 않은 두상에 미간 사이 주름이 잡힌 채 입을 약간 벌려 간절한 염원을 말하는 듯한 오른쪽 소조상, 숱한 고뇌를 함축한 노수행자의 면모가 역력히 비치는 왼쪽 소조상은 모두 당대의 이름 모를 승려의 자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나말여초 시기 해인사 희랑조사상과 더불어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사실주의 조각상의 명품이다. 시지동 특별전은 시대별 대표유물들을 소개한 1전시실이 8월6일까지, 삼국시대 마을과 공방에 초점을 맞춘 2전시실은 4월2일까지 열린다. ‘흙에서 찾은 불상’전은 9월10일까지 볼 수 있다. (053)768-6051.
대구/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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