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1층 전시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펼쳐지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파티·PaTi)의 아카이브 전시장. 거대한 원형 플랫폼 위에 파티의 강의 자료와 학생들의 디자인 작업, 동영상, 협동조합 지도, 졸업장, 그림 등이 설치작품 형식으로 펼쳐진다. 디자인 교육공동체 만들기에 진력해온 안상수 디자이너의 현재 생각과 실천을 볼 수 있는 이 전시의 핵심 영역이다.
이 디자이너의 공식 복장은 푸른색 작업복이다. 서울 청계천4가에서 샀다는 한벌짜리 슈트 작업복 입고 빨간 빵모자를 쓰고 문화판을 돌아다닌다.(작업복은 그가 2012년 세운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파티·PaTi) 학생들의 교복이기도 하다.) 올해로 예순다섯해를 산 한글 ‘멋지음이’(디자이너) 안상수(65)씨는 여전히 젊고, 통통 튀면서 산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끊임없이 캐묻고 꿈을 빚어내고 벌여놓는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디자이너로는 처음 그를 격년제 원로회고전 성격의 ‘세마(SEMA: 미술관 약칭) 그린’전에 초대했다. 14일부터 시작된 ‘날개.파티’전이다. 전시는 1985년 한자체의 격자형 틀에서 한글 자모를 뛰쳐나오게 만든 ‘안상수체’를 창안해 한글디자인의 총아가 됐던 그가 왜 지금도 개구쟁이로 사는지 일러준다.
입구에 붙은 5점의 아크릴 문자도 연작 ‘홀려라’는 전시를 보는 큰 화두다. ‘ㅎ’, ‘ㅍ’ 등의 한글 자모가 민화 문자도와 접붙은 작품들은 그를 처음 홀린 한글과, 한글을 창제한 불세출의 디자이너 이도(세종대왕)와의 인연을 담는다. 안 작가는 “연애하듯, 몰입하듯 대상과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이 홀림이다. 2012년 홍익대 교수를 사직하고 협동조합 형태의 교육기관 파티를 세울 때 교육공동체란 또다른 홀림을 체험했다”고 이야기한다.
안상수 디자이너가 전시에 즈음해 만든 문자무늬 기둥. ‘ㅍ’, ‘ㅎ’ 등의 한글 자모를 민화의 문자도 이미지와 결합시켜 만든 작품이다.
그 또다른 홀림을 전시장 오른편 ‘파티’의 아카이브 공간에서 엿본다. 거대한 원형 플랫폼 무대다. 올해 12명 졸업생을 처음 배출한 파티의 강의 자료와 학생들의 디자인 작업물, 동영상 등이 빼곡이 펼쳐졌고, 그 위엔 한글과 연관된 위인들인 세종, 주시경 등의 사진상들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설치작품 형식을 끌어들여 작가가 배곳(학교의 순우리말)에서 작업 중인 멋지음(디자인) 교육실험의 풍경과 산물들을 다채롭게 꾸려 전해준다. ‘마친 보람’이란 문구와 졸업생 이름을 적어 넣은 도자기판 졸업장이며, 갖가지 색깔과 문자 디자인으로 치장한 식권, 기존 제본과 전혀 다른 판형과 이미지가 꿈틀거리는 책 장정 시안 등은 강사, 학생들이 부대끼며 일궈낸 멋지음의 산물들이다. 파주 배곳터 곳곳에서 이색 의상을 입고 재학생, 강사들이 춤추고 몸짓하며 펼쳐낸 즉흥 퍼포먼스 영상들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창의적 발상으로 삶 자체를 바꾸는 게 디자인의 알짬이라는 신념이 전해지는 풍경들이다. 작가는 활자판, 칠판 등 교실까지 통째로 플랫폼 무대 옆에 옮겨 5월까지 여기서 워크숍 수업도 진행한다.
21일 전시를 보러온 도법 스님(왼쪽)과 담소 중인 안상수 디자이너. 생명평화운동을 펼쳐온 도법 스님이 자기 작업에 가장 큰 영감을 준 멘토 중 하나라고 그는 말했다. 안 디자이너는 2004년 도법 스님의 탁발순례 장정에 동참해 숙식을 같이하기도 했다.
왼쪽 방은 의미를 넘어 이미지의 미감을 살린 작가 특유의 한글 디자인 작품들과 그의 인터뷰 영상, 작업 이력을 담은 각종 도표들이 나와 있다. 한글 자모들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라고 생각하는 ‘ㅎ’을 마오쩌둥이나 앤디 워홀, 이상의 얼굴상과 결합시킨 팝아트풍의 실크스크린 작업들과 추상적 이미지로 변신을 감행하는 문자들의 영상 작업 등이 명멸한다. “이 전시는 세종대왕 이도를 위한 잔치이며 난 배우일 뿐”라고 단언하는 안 작가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름다움이야말로 문화의 가장 강력한 힘이지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름다움을 삶에서 발견하고 제대로 보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여생의 목표입니다. 전 배움의 날개를 붙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호이자, 교장 대신 부르는 직함이 ‘날개’다. 그는 자신을 선생 대신 ‘날개’로 불러달라고 했다. 5월14일까지. (02)2124-88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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