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글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계산무진’(溪山無盡:간송미술관 소장). 물이 콸콸 용솟음치는 계곡과 산의 기운이 울렁거리는 듯한 글씨다. 직선과 곡선으로 자획의 윤곽을 확 바꾸는 파격을 부리면서도 글자들 사이의 균형감까지 안배하는 필력이 놀랍다.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일컫는 조선말기 대학자 추사 김정희(1785~1856)의 명작들을 총망라한 전작도록집이 세상에 나온다.
다음달 초 현암사에서 출판되는 800쪽 넘는 거작 <추사명품>에 출간 전부터 학계와 미술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저자는 추사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간송미술관의 최완수(75)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정병삼 숙대교수와 강관식 한성대교수, 백인산 실장, 김인규 연구원 등 간송학파 제자들과 미술관에서 수십여년 전시를 열면서 연구검증한 성과를 토대로 펴낸 노작이다. 앞으로 추사 작품의 감정과 연구에 가장 필수적인 정전이자 전범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주 인쇄에 들어갈 이 도록에는 명필이자 문인화 대가였던 추사의 저 유명한 추사체 글씨들부터 그림, 인장, 전각, 현판, 주련(옛 집 기둥에 새겨 붙이는 싯구 등의 글씨판) 등 그가 남긴 명작 100여점이 망라된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사의 명품 글씨인 ‘명선’, ‘계산무진’, ‘사야’, ‘대팽고회’ 등과 리움 소장 간찰글씨, 국민문화재인 <세한도> <불이선란> 등의 명화들이 도록에 들어가게 된다.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추사가 각별한 관심을 쏟은 다양한 인장·전각 작품들도 처음 정리돼 수록된다.
더불어 작품마다 전면과 부분 등 여러 각도에서 찍은 다양한 도판들과 최 소장과 제자들이 수십년 세월 일일이 집필한 장문의 해제와 논문들이 책을 수놓는다. 추사 글씨의 서예사적 의미와 추사체의 변천 과정, 추사 가문의 가계 등에 대한 내용들로 채워진 논문들만 연구서 한권을 넘는 분량을 차지한다. 연구소 쪽 관계자는 “추사학에서 필수적인 연구 기반이 되는 추사의 검증된 진작과 명품, 자료들을 일별해 정리한 것”이라며 “최 선생이 추사의 생애를 담은 추사평전을 집필하기 위해 거쳐가야하는 준비 과정을 마무리지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불이선란>. <세한도>와 더불어 추사가 그린 문인화의 쌍벽을 이루는 명작이다. 글씨 쓰듯 쳐낸 성근 난초그림은 그의 몸과 정신이 투영된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평가된다. 귀양살이를 마치고 과천에 은거하던 노년시절 그렸다.
<추사명품>이 수십여년 연구와 전시로 검증된 진작들만 간추려 만든 최초의 서화도록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어떤 작품들이 수록될지를 놓고 고미술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술판에서 대가의 전작도록은 ‘카탈로그 레조네’라고도 한다. 전문가, 유족에 의해 검증된 진작들을 망라해 싣기 때문에 시장 유통과정, 학술조사 등에서 발굴되는 작품들의 진위 검증에 가장 요긴한 잣대다.
글씨, 금석문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추사의 작품들은 국내 대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가짜들이 나도는 것으로 유명하다. 위조품 역사도 구한말까지 올라갈 정도다. 무수한 추사 관련 전시들이 열렸지만 진위를 둘러싼 논란도 끊일 새 없었다. 실제로 2007년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이 열었던 기획전 ‘추사문자반야’는 진위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글씨와 그림들을 추사 작품이라며 다수 출품해 진위 논란이 불거졌고, 전시도록조차 내지못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현실에서 진위 기준이 되는 전작도록집의 필요성이 간절했지만, 그동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모든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라고 하여 통유(通儒)라는 존칭으로 불렸던 추사 작품의 진위를 가릴 안목과 감식안을 지닌 권위자들도 거의 없었던 까닭이다. 이번 전작도록 출간은 60년대 이래 겸재 정선과 추사 연구에 전념해온 최완수 소장이기에 가능한 작업이란 평가도 나온다.
추사의 애제자 소치 허련이 스승을 추억하며 그린 반신상(개인소장).
일각에서는 출간 뒤 일부 전문가나 화상들이 도록에 빠진 작품들을 들고나와 시비를 벌이거나 안목에 대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간송학파의 한 연구자는 “수록 작품들을 가리는 것이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안다. 최 소장과 연구진들도 여러차례 신중한 검증과 분석과정을 거듭했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간송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