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한 디자인’ 전시장 일부. 디자인 그룹 ‘그라프트 오브젝트’가 중세 유럽의 고딕아치 건축에서 착안해 만든 아치형 얼개의 통로와 가구류 사진들이 보인다. 맨 안쪽 공간에 있는 것은 윤정원 작가의 인형 설치 작업이다. 수백개 인형들에 갖가지 장식 재료를 붙여 독특한 캐릭터의 요지경을 만들어냈다.
한국 근현대조각사에서 대중에게 감동과 드라마를 남긴 대가들은 찾기가 쉽지 않다. 고독하게 인물상의 심연을 탐구하다 자살로 삶을 마친 권진규와 근대조각의 선구자로 풍운어린 삶을 살았던 김복진, 군상조각으로 두각을 드러내다 병고로 타계한 류인 등을 어렵게 떠올리는 정도다. 불교조각과 민예품의 전통을 방기한 채 20세기 초 로댕과 부르델, 브랑쿠시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 조각의 계보를 일방적으로 수용했고, 1970~80년대 뒤늦게 정체성을 모색하다가, 90년대 이후 조악한 공공조형물 사업에 작가들이 휩쓸려가면서 전시조차 찾기 힘들어진 게 한국 조각계의 현주소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2층에 마련한 수원 출신 김인겸(72) 원로조각가의 회고전 ‘공간과 사유’(6월4일까지)는 조각 전시로는 드물게 작가론과 작품 변천사에 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꾸려진 작품 마당이다. 김 작가는 미술판에서 ‘묵시공간’이란 제목의 80~90년대 추상조각 연작과 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첫 한국관 전시 당시 출품 작가로 기억된다. 전시는 70년대 매끈한 선면의 브랑쿠시 조각에 매료되어 조각계에 입문한 뒤 80년대 이후 전통적 조형성과의 만남을 추구하면서 ‘묵시공간’ ‘빈 공간’ 등의 영적인 세계로 나아간 작가의 40여년 여정을 시기별 작품들과 함께 펼쳐 보여주고 있다. 73년 홍대 조각과 졸업전에 출품한 브랑쿠시풍의 추상조각 <생성>을 시작으로 80년대 한옥, 석탑, 석비 같은 전통문화유산의 형상성이 반영된 <묵시공간> 연작과 소품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목판과 팔각형판 등이 모여 대열을 이루는 이 연작들은 작가가 집요하게 한국 현대조각의 정체성 찾기에 나름 골몰했음을 드러낸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레지던시 등에 참가하며 국제무대에서 활동했던 90년대 이후에는 빈 주머니나 납작해진 원통 모양의 단순한 이미지들로 비어 있음과 형태성의 관계를 탐구하는 <빈 공간> 연작들이 등장해 좀더 근원적인 세계로 지평을 넓히려는 의도를 표출하고 있다. 조각을 설치미술 영역으로 확장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프로젝트 사고의 벽>(1992)과 95년 베네치아 한국관 개관 당시 기포가 울렁거리는 수조와 유리벽 미로를 겹쳐 만든 출품작 <프로젝트 21 내추럴 네트>도 일부분 재연되어 있다. 시대의 정신과 감각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해온 한국 현대조각사에서 여러 한계에도 자기만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원로조각가의 내면과 고뇌가 설핏 어른거리는 전시다.
미술관 1층에 마련된 ‘공공연한 디자인’전(5월21일까지)은 우리 일상생활과 가까이 잇닿은 디자인의 상상력을 여러 작가의 재기 넘치는 작업들을 통해 일러준다. 중세유럽의 고딕아치 건물에서 착안해 만든 아치형 통로와 가구들을 선보인 디자인 그룹 ‘그라프트 오브젝트’, 비닐하우스의 모양새를 응용해 공원구조물, 주택 가구 등을 새롭게 디자인한 ‘베리띵즈’ 등의 작업들이 눈에 띈다. (031)228-3800. 수원/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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