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산수유가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는 모습이,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나뭇가지에 차곡차곡 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란 리본 산수유, 2017년 4월, 펜&수채, 33.5×24.5㎝
꽃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리지만, 풍경이나 인물은 0.1㎜, 0.05㎜ 검은색 펜으로만 주로 그린다. 유일하게 풍경이나 인물 채색에 사용했던 색은 노랑이었다. 노란색을 특별히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2013년 봄. 곧 철거될 서울 서대문구 아현4주택재개발지역에 스케치하러 들어갔을 때였다. 텅 빈 동네 골목 여기저기 그림 그릴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다, 어느 집 대문 밖에 서 있는 노란 기타 한 대를 발견했다. 순간! 가슴에서 크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궁핍한 판자촌 생활에 따스한 힘이 되어 주었을 기타. 동네 전체가 철거 직전의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던 탓에, 노란색의 기타가 더 도드라져 보였을 수도 있겠다. 노란 기타는 철거도, 가난도, 억울함도, 초라함도,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는, 작지만 당당한 힘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애초 종이 전체를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하려던 마음을 접고, 동네는 검은 펜으로 그린 후, 그 기타에만 노란색을 칠했다. 쿵! 가슴을 울렸던 그 소리를,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 가슴에서도 들리게 할 좋은 방법일 듯 싶었다.
아현동 기타, 2013년, 펜&수채, 20×30㎝
심쿵!(심장이 쿵쾅쿵쾅거린다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 그 후 노란색 포인트가 들어가는 그림을 시리즈로 그려보기로 했다. 철거될 집 벽에 걸려 있던 복조리도, 비 오는 날 북촌 거리의 우산도, 이른 봄 들판의 봄꽃도, 빈민촌 집 밖에 널린 빨래도, 저녁 식사 그릇에 놓였던 달걀노른자도…. 모두 그날, 그 순간, 그 풍경 속에서, 내가 찾아낸 ‘심쿵!’들이었다. 스무 점 정도 그렸을까? 노란색 포인트 그림 그리기가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열심히 심장을 울리는 풍경 속 사물들을 찾아다녔는데, 어느 순간 그림 구조상 그럴듯해 보이는 자리에 괜히 노란색을 칠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해서다. 옥상에 올라가 큰 동네 풍경을 그리고 나서는, 한 풍경 속에 가슴을 울리는 포인트가 너무 많아, 어느 한곳에만 노란색을 칠하기 힘들어졌다.
가지마다 달린 노란 꽃몽우리들이
세월호 노란 리본 같았다
바람에 살살 흔들리며
흐느껴 울고 있는 듯했다
한참 동안 노란색 포인트가 들어간 그림 그리기를 잊고 지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고 이후 노란 리본이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왔다. 옷에도, 가방에도, 손목에도, 동네 가게에도…. 노란 리본은 세월호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 속죄의 상징이 되어 갔다. 2015년 열었던 첫 전시회 ‘서촌 오후 4시’에 걸린 내 노란색 포인트 그림들을 보고, 관람객들은 세월호의 아픔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했다. 아니라고 설명하기 전까지는. 지난해 4월에는 한 잡지에서 노란색 우산이 들어간 내 그림을 세월호 2주년 특집호 표지로 쓰고 싶다고 요청해 왔다. 노란 우산이 세월호 아이들을 보호해 줄 따뜻함의 상징으로 해석되었나 보다. 흔쾌히 쓰라고 하면서도, 세월호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렸던 그림이 아니었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여름, 2013년, 펜&수채, 23×30.5㎝
개나리, 병아리, 어린이 등 주로 밝고 경쾌한 것들의 상징이었던 노란색은, 세월호 사고 이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아픔의 색깔, 슬픔의 색깔이 되어 버렸다. 노란색만 보면, 특히 4월에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멀리 인왕산이 보이는 서촌 골목길은, 내겐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며칠 전 그림 그리러 나가던 길이었다. 이 풍경 속에 노랗게 핀 산수유나무가 쑥 들어왔다. 발걸음을 멈추고 골목길에 앉아, 한참이나 산수유나무를 바라봤다. 가지마다 달린 노란 꽃몽우리들이, 세월호 노란 리본 같았다. 바람에 살살 흔들리며, 흐느껴 울고 있는 듯했다. 미안하다고, 잊지 않겠다고, 기억하겠다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노란 리본들. 노란 산수유. 심쿵!
2017년 4월16일. 세월호 3주기를 맞으면서 노란색이 있는 그림을 다시 이어 그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4년 전 퇴근길에 튤립 화분을 사서 식탁에 올려놓고 그린 그림이다. 달력에 동그라미 친 16일은… 개인적인 어떤 기념일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해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후, 사람들은 “아! 4월16일! 세월호 그날을 의미하는군요!” 하며 먼저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민망해서 손을 내저었다. 4월 어느 날, 2013년, 펜&수채, 20×30㎝
▶ 김미경 2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살이 되던 2014년 전업 화가를 선언했다. 서촌 옥상과 길거리에서 동네 풍광을 펜으로 그려 먹고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화가다. 전시회 ‘서촌 오후 4시’(2015년)와 ‘서촌꽃밭’(2015년)을 열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접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그려낸 따뜻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꿈을 향한 각자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듯싶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