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공연 장면. (주)아이엠컬처 제공
막이 오르면 어드벤처 전문극단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연습실.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당장 내일까지 뮤지컬 한 편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다. 배우들은 즉석에서 관객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배우: “장르는 무엇으로 할까요?” 관객들: “로맨스 어드벤처?” “스릴러 어드벤처?” “막장 어드벤처!”
배우: “주인공 이름은?” 관객들: “민소희.”
배우: “꼭 들어가야 할 명대사는?” 관객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배우: “피피엘(PPL·간접광고)도 있대요. 요 앞에 앉은 사장님 무슨 업종 종사하세요?” 관객: “주류사업.”
배우: “회사 이름은?” 관객들: “카스처럼! 폭탄주 제조업체요.”
배우: “주인공 나이는?” 관객들: “18살.” “에이~ 피피엘이 주류인데. 19살!”
이렇게 해서 이날 공연은 ‘민소희라는 이름의 고아원 출신 19살 소년이 해적왕이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막장 어드벤처 <바람직한 고아원>으로 결정됐다.
연습실 풍경이 아니다. 14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3관에서 막이 오른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첫 공연 현장이다. ‘즉흥 뮤지컬’을 내세운 이 작품은 관객들이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독특한 형식의 공연이다.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 그리고 배우들의 순발력이 더해져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공연 장면. (주)아이엠컬처 제공
‘관객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준다’는 즉흥공연이 공연계에 새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 ‘현장성’이라는 무대공연의 특성을 극대화한 이런 작품들은 함께 만들어 가는 즐거움과 예상치 못한 의외성을 바탕으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장르도 뮤지컬, 클래식, 춤까지 다양하다.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김태형 연출은 이런 즉흥공연이 무대예술의 예측 불가능성을 공연의 ‘위험 요소’가 아닌 ‘재미 요소’로 바꾼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출은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갔다가 즉흥극 만드는 팀을 여럿 만나면서 꼭 한 번 한국에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돈 내고 공연 보며 이렇게 불편한 적 처음이죠?”, “이 공연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은 우리 책임만이 아냐!!” 등 중간중간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배우들의 멘트는 폭소를 자아낸다. “오늘 만든 이야기 다신 못 봐. 오직 한 번 펼쳐질 우리 인생처럼”이라는 엔딩곡의 가사는 묘한 감동마저 불러일으킨다.
가브리엘라 몬테로 공연 사진. 엘지아트센터 제공
휴대전화 벨소리가 한 곡의 클래식으로 재탄생한다? 즉흥연주는 흔히 재즈의 전유물처럼 여겨지지만 클래식에서도 즉흥연주를 만날 수 있다. 즉흥연주로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베네수엘라의 가브리엘라 몬테로(47)가 21일 엘지(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 독주회를 연다. 몬테로는 1995년 쇼팽국제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고,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남미 대표로 연주를 했던 실력파 클래식 음악가다. 하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한 건 즉흥연주다. 관객들이 불러주는 멜로디로 그 자리에서 연주를 한다. 휴대전화 벨소리, ‘해리 포터’ 주제곡, 아리랑 같은 민요, 생일축하 노래 등이 전혀 다른 새로운 음악으로 즉석에서 탈바꿈한다. 즉흥연주의 핵심 역시 관객과의 소통이다. 관객이 준비해 온 만큼 연주자의 연주는 생동감을 얻는다.
몬테로는 “관객들은 사소한 멜로디가 거대한 작품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다. 그래서 객석에서 터져나오는 놀라움의 웃음을 들으면 나도 같이 미소짓게 된다”며 “즉흥이야말로 나 자신을 표현해내는 가장 자연스런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서울국제즉흥춤축제 한 장면.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사무국 제공
즉흥공연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춤’이다. 올해도 서울국제즉흥춤축제가 18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을 중심으로 열린다. 이번 축제는 앞서 열린 부산국제즉흥춤축제(14~16일), 앞으로 열릴 제주국제즉흥춤축제(다음달 25~27일)와 연계해 개최된다. 프랑스·미국·홍콩·일본 등에서 공모와 초청을 통해 선정된 예술가 150여명이 참여한다. 공연 당일 처음 만난 춤꾼과 일반인들이 정해진 안무 없이 서로의 동작과 표정을 보며 춤을 이어가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서울국제즉흥춤축제 한 장면. 서울국제즉흥춤축제 사무국 제공
장광열 예술감독은 “즉흥은 무의식으로부터 이미지를 끌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무용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미국·유럽 등에는 이미 공연의 한 장르로 자리잡은 지 오래”라며 “이미 짜인 작품, 규격화된 공연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몸짓은 무용가들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