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산을 닮은 사람 ‘평양 아바이’의 그림 순정

등록 2017-05-07 15:31수정 2017-05-07 20:47

박고석 화백 탄생 100돌 전시
박고석 화백이 1992년 그린 만년작인 <설악청경>. 과거 작품에서 힘차게 휘둘렀던 묵직한 필선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선묘와 다채로운 색조를 구사해 원숙한 산악 풍경을 빚어냈다.
박고석 화백이 1992년 그린 만년작인 <설악청경>. 과거 작품에서 힘차게 휘둘렀던 묵직한 필선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선묘와 다채로운 색조를 구사해 원숙한 산악 풍경을 빚어냈다.
그림에 바친 ‘평양 아바이’의 순정은 끈끈하고 깊었다. 사람과 산이 좋아 평생 두 소재만 부여잡고 화력을 쏟아부은 평양 출신의 그림 대가 박고석(1917~2002). 화초가 아닌 잡초 가꾸길 좋아했고 “인간의 연약한 육체가 능히 가까이 할 수 있는 광선”이라 석양 가까울 무렵 오후의 광선이 한없이 좋았다는 이 휴머니스트가 평생 남긴 대표작들이 모처럼 세상에 나와 눈호강을 안겨준다. 서울 소격동 현대화랑에서 고인의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달 말부터 열리고 있는 ‘박고석과 산’전이다.

전시장 1, 2층엔 현대화랑, 부산공간화랑 등 여러 중견 화랑과 원로 비평가 오광수씨가 소장가들을 수소문해 구한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고인의 시기별 대표작 40여점이 내걸렸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전국의 명산 그림 걸작들과 초창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51년 작 <범일동 풍경>, 53년 작 <소녀> 등이 두루 나왔다. 인간주의, 표현주의, 야수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화풍의 변화상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다.

“회화란 영원히 원시적인 작업으로 끝나는 것”이란 작가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박고석 그림의 매력은 대상과 하나로 몰입할 때 나오는 생동감과 생명력이다. 특히 강렬한 원색의 색덩어리를 특유의 일필휘지 필법으로 휘휘 부려넣으며 장쾌한 산악 풍경을 빚어내는 그의 장년기 산 그림은, 형상의 묘사보다 기운을 담는 것을 중시한 동아시아 전통회화의 본령과도 잇닿아 있다. 전시에 출품된 <외설악>, <백암산>, <공룡능선>은 서구 표현주의 화풍과 전통회화의 정신성이 융합된 박고석의 역동적인 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작가가 68년부터 등산사생을 본격화한 이후로 80년대까지 정력적으로 몰두한 산 연작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굴레 속에서 누구보다도 풍운 어린 삶을 살며 인간의 삶 자체에 지고지순한 애정을 키웠던 예술가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니혼대학에서 동서양화론을 공부했던 박고석은 해방 직전까지 일본 쇼치쿠 영화사에서 만화영화 부문 제작일을 했다. 한국전쟁 때는 월남해 피란지 부산에서 이중섭, 김환기, 한묵 등의 대가와 협업하며 동고동락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작가는 평양을 등진 실향민이었던 자신의 휴머니즘적 성향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초창기 작업은 인간의 원형성 탐구로 대변된다. 육중한 필선과 기묘한 색감으로 전란 시기 부산 범일동의 인간군상들을 야수파적 터치로 그린 <범일동 풍경>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윤곽만 있을 뿐 구체적인 얼굴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원형성에 대한 탐구를 짐작하게 해준다.

수없이 산에 올라, 호흡과 눈길을 산기운에 맞추는 몰입 과정을 거쳐 사생한 그의 산 그림은 밑그림 스케치가 매우 치밀하고 탄탄하다. 그런 바탕 위에 속도감 있게 붓질하며 색감을 입히고 완성했기 때문에 유화와 스케치가 한 덩어리가 된, 밀도감 높은 작품들이 태어났다. 휴머니즘 정신과 필력이 어우러진 박고석 화풍의 또다른 매력은 92년 대작 <설악청경>을 비롯한 90년대 말년 작업들에서도 드러난다. 전체 산악 풍경을 조감하는 배경 아래 꽃들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잔잔한 관조의 여유가 넘실거리는 말년작들은 평생 일관되게 인간이란 화두를 미학적으로 변주해온 대가의 의연한 황혼을 보여주고 있다. 23일까지. (02)2287-359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현대화랑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