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오늘도 걷는다

등록 2017-05-19 20:14수정 2017-05-19 20:31

[토요판] 김미경의 그림나무
(10) 청와대가 보이는 풍경
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청와대 이야기들. ‘오늘도 걷는다 2’는 청와대 근처에 앉아 그린다는 이유로, ‘서촌 옥상도 5’는 청와대가 너무 잘 보이는 풍광이라는 이유로, 못 그릴 뻔했던 사연이 있었던 그림이다. 앞으로 내 그림 속에 청와대와 북악산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등장할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 2014년, 펜, 84x29.4㎝
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청와대 이야기들. ‘오늘도 걷는다 2’는 청와대 근처에 앉아 그린다는 이유로, ‘서촌 옥상도 5’는 청와대가 너무 잘 보이는 풍광이라는 이유로, 못 그릴 뻔했던 사연이 있었던 그림이다. 앞으로 내 그림 속에 청와대와 북악산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등장할지 나 자신도 궁금하다. 2014년, 펜, 84x29.4㎝

미국에서 열리는 어떤 전시회에 내 그림 ‘오늘도 걷는다 2’가 초청받아 포장해 보냈다. 액자 유리가 깨지지 않게 싸느라 그림을 안고 한참을 끙끙대다, ‘참 너는 사연도 많은 그림이구나~ 태평양까지 다 건너가고~’ 싶은 생각에 혼자 웃었다.

2014년에 작업한 ‘오늘도 걷는다 2’는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 앞에 앉아, 서촌 방향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앞쪽의 느티나무와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식당, 기와집, 수많은 건물들, 공사 중인 ‘보안여관’ 옆 건물, 저 멀리 인왕산…. 이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묘한 풍경에 홀딱 빠져 영추문 앞 보도블록 위에 낚시 의자를 놓고 앉아 며칠째 그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청와대를 지키는 202경비단 ○○○ 경사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나가면서 간단히 사진 찍고 하는 건 괜찮은데요. 오랫동안 여기 앉아 그림 그리는 건 안 됩니다.”

“왜요?”

“여기는 보안 지역입니다.”

“….”

국민신문고에 ‘공공장소에 앉아 그림 그릴 권리’를 주장하는 민원을 넣고, 한참을 기다려 서울지방경찰청에서 ‘그림 그려도 좋다’는 내용의 허락 공문을 받은 후에야 다시 그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그림 그리는 나이 든 여자 그냥 내버려 둬라’(하하하)라는 전달을 받지 못한 경찰들의 검문검색에 몇 차례나 시달려야 했다. 그때마다 주머니에 넣어둔, 경찰청에서 받은 허락 편지를 웃으며 쑤욱 내밀었다.

청운아파트, 2014년, 펜, 42x29.4㎝
청운아파트, 2014년, 펜, 42x29.4㎝
서촌 길거리에서, 옥상에서, 서촌 풍경을 그리며 살다 보니, 청와대가 이래저래 자꾸 보이고 걸린다. 이 옥상, 저 옥상, 옥상 동냥하듯 다니다 보니 옥상마다 색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기막힌 풍광의 아파트 옥상에서 그리다,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청와대가 너무 잘 보이는 옥상에서 그리려면, 아파트 주민회뿐 아니라, 동네 파출소, 종로경찰서 보안계에까지 신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올라가서 그리고 싶어도, ‘보안상’ 허락을 받을 수 없어 못 올라가는 옥상들도 많다.

촛불시위, 탄핵, 선거까지 다 끝나고
다시 옥상에 올라 그리다 보니
예전과 꼭 같은 풍경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새롭다.

37년여 전인 1980년대 초 대학 시절. 청와대 바로 옆, 지금은 ‘청운공원’이 된 청운아파트에서 3년여를 살았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버스를 타고 내리면, 현재 ‘윤동주문학관’인 청운가압장과 물탱크를 오른쪽에 끼고, 비스듬한 언덕을 걸어 올라갔었다. 살던 집 바로 코앞에 청와대가 있었지만, 내가 들어가 볼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살던 동네의 이미지는, 청운아파트 창문 밖으로 보이던 서울 시내 야경뿐이다. 3년여를 바로 옆에서 살았지만, 북악산과 청와대는 뚜렷한 시각 이미지로 남지 못했다. ‘쳐다봐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명령’을 내면화해서였을까?

서촌 옥상도 5, 2014년, 펜, 84x29.4㎝
서촌 옥상도 5, 2014년, 펜, 84x29.4㎝
촛불시위, 탄핵, 선거까지 다 끝나고 다시 옥상에 올라 그리다 보니, 예전과 꼭 같은 풍경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새롭다. 청와대를 어디로,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들에 귀가 쫑긋해지기도 한다. 청와대가 없는 서촌은 어떤 모습일까? 청와대가 없어지면, 고도제한이 풀려 오히려 우후죽순으로 개발돼 버리는 건 아닐까? 북악산에서 청와대로 곧장 내려가 광화문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걸까? 청와대 쪽에 앉아 그리는 서촌의 모습은 어떤 걸까? 이 생각 저 생각에 혼자 마음이 설렌다.

‘오늘도 걷는다 2’ 그림 제목을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림 속 청와대를 지키는 전경들의 모습을 보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듣는 제목이지만, 외국인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옛 왕이 살던 궁궐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동네 서촌.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와 가까워 거리 곳곳엔 경찰들이 수없이 배치돼 있다. 보초 서는 경찰들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도, 서촌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뭐 이런 긴 설명을 썼다.

효자동, 그리움(서촌 옥상도 24), 2016년, 펜, 24.5x33.5㎝
효자동, 그리움(서촌 옥상도 24), 2016년, 펜, 24.5x33.5㎝

▶ 김미경 2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살이 되던 2014년 전업 화가를 선언했다. 서촌 옥상과 길거리에서 동네 풍광을 펜으로 그려 먹고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화가다. 전시회 ‘서촌 오후 4시’(2015년)와 ‘서촌꽃밭’(2015년)을 열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접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그려낸 따뜻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꿈을 향한 각자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듯싶다. 격주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