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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핑크빗 물감 아래, 찬란한 시위대여

등록 2017-06-08 10:30

최민화 작가 6·10 항쟁 회고전

낭만적 색감과 정치적 충돌의 역설
1992~2002년에 항쟁 재현한 그림
디지털 작업으로 원화처럼 재출력
21세기적 방식으로 당시 ‘복원’해
1987년 6월항쟁의 거리시위 현장을 붉은빛 스며든 화폭에 담은 최민화 작가의 대작 <파쇼에 누워 1>의 일부분.
1987년 6월항쟁의 거리시위 현장을 붉은빛 스며든 화폭에 담은 최민화 작가의 대작 <파쇼에 누워 1>의 일부분.
2017년 현재와 1987년 그때는 어떻게 다를까.

30년 전 거리 투쟁의 황홀경이 아른거린다. 각진 사방 벽을 오밀조밀 채운 크고 작은 그림들 속에서 몽롱한 군상들이 스쳐간다. 붉은빛 분홍빛 흰빛의 색감을 입은 시위대 군상들이 차례차례 다가왔다가 멀어져간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과 을지로, 남대문로를 돌며 풀잎처럼 누웠다가 일어나 독재타도를 외쳤던 시민과 청년들의 꿈결 같은 몸짓들이 화폭에 떠다니고 있다.

이 헛헛한 그림떼들을 그린 최민화(63) 작가는 작품들을 두 문장으로 종잡아 이렇게 썼다. ‘모든 회상은 불륜이다. 망각은 학살만큼 본질적이므로.’ 바로 이 글귀가 서울 홍대 앞 대안공간 루프 지하에 펼쳐진 작가의 전시회 제목이 되었다.

“회고전 아닌 회고전”이란 그의 고백대로, 전시는 만듦새가 특이하고 기구하다. 출품작들은 신작들도, 6월항쟁 당시 그린 작품들도 아니다. 1980~90년대 도시 부랑자들의 삶을 분홍빛 화면에 담은 연작들로 국내 형상회화사에 점을 찍은 작가가 1992~2002년 몽롱한 톤으로 재현했던 항쟁의 현장 그림 50점을 천에다 디지털 작업으로 원화처럼 재출력한 것들이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10년 전인 2007년 항쟁 20주년에 이미 전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마당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 전시의 시점은 광화문 촛불혁명을 갓 지났다. 장소 또한 90년대 이후 청년미술의 산실이 됐던 대안공간의 원조다. 이런 시공간의 묵직한 의미들이 출품작들을 다기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이끌고 있다. 국내 미술계의 대표적 웹진인 네오룩미술연구소의 최금수 소장과 미술기획자 이섭·김진하씨를 비롯한 86세대 미술인 수십여명이 의기투합해 수작업이 아닌 디지털 재출력이라는 21세기적 복제 방식으로 항쟁의 이미지를 재현했다는 사실도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지랄탄이 난무하고, 닭장차가 질주하던 당시 시위 현장을 작가는 색층이 얇지만, 현란하고 잽싸게 붓질이 약동하는 화면으로 아름답게 묘사한다. 분홍빛 물감 바다 속에 사람들은 떠다니듯 구호를 외치고 드러눕고 시위를 한다. 사이사이로 작가의 자화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정치가 충돌했던 현장이 낭만적인 색감 위에서 과거인지 지금인지 구분하기 힘든 장면들로 부유한다. 그래서 초현실적이고 기괴한 환영처럼 비치기도 한다. 모든 현상과 질서가 폭력적인 권력에 짓눌려 제대로 설 자리를 잡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자각이 새삼 몰려오는 풍경이다.

낭만적 색감이 물든 항쟁의 회상도들은 지인인 김진하 기획자가 짚은 것처럼 미술을 현실정치에서 생물화시키려는 ‘정치적 심미성’을 드러낸다.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겪은 삶의 여러 틈들을 그린 것”이라는 최 작가의 구작들은 촛불혁명의 열광 속에 재조명되는 6월항쟁기의 변혁에 대한 열정을 미학적으로 반추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되는 셈이다.

구작을 더욱 선연하게 리프린팅한 전시 방식은, 87년 항쟁 현장과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세인의 눈에 강하게 남았던 최 작가의 걸작 ‘이한열 부활도’ 같은 걸개그림과 숱한 목판화 같은 당대 현장미술품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도 낳는다. 안타깝게도 이한열 부활도는 장례식 현장에서 전경차에 의해 부서지며 사라졌고, 걸개그림들은 대가였던 최병수 작가가 이한열 초상 등 자신의 작품들을 애써 소장해온 것을 빼고는 거의 소재를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당대 현장미술의 자취들과 그 공과를 정리하는 기념 기획전시 없이 30주년을 맞는 것도 허탈감을 준다. 김종길 평론가는 “너무 늦었지만, 공공미술관 등이 나서 87년 항쟁의 기억이 서린 걸개그림 같은 현장미술품의 체계적 수집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전시는 30일까지. (02)3141-1377.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대안공간 루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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