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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히틀러, 금서 탑, 난민보트…미술, 위기의 지구촌을 호출하다

등록 2017-06-13 14:26

노형석 기자의 유럽 그랜드아트투어 상
독일 ‘카셀 도쿠멘타 14’ 전 가보니

유럽의 고향이자 세계경제의 변방
그리스 미술 이미지를 중심으로
지금·여기·우리를 알아보자는 화두

유일한 한국인 김수자 보따리 작품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금서 탑’ 등
변방사·미술사 부각한 작품들 눈길
폴란드 작가 피오트르 우클란스키의 사진 설치작업 <리얼 나치스>. 독일 나치 정권의 주요 인물들과 이들이 촉발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사 군인들의 이미지를 히틀러를 중심으로 조합해 한 벽면에 가득 채웠다.
폴란드 작가 피오트르 우클란스키의 사진 설치작업 <리얼 나치스>. 독일 나치 정권의 주요 인물들과 이들이 촉발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사 군인들의 이미지를 히틀러를 중심으로 조합해 한 벽면에 가득 채웠다.
그랜드 투어? 초여름 국내 미술인과 애호가들의 관심은 21세기 유럽의 그랜드 투어 미술기행으로 쏠려 있다. 그랜드 투어란 원래 17~19세기 영국, 독일 등 북구의 귀족, 유한층이 예술강국이었던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미술·건축 명소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교양을 쌓았던 인문적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그랜드 투어가 다시 회자되는 건 올해 세계 굴지의 미술제가 모두 겹치면서 과거 투어에 비견할 만한 견문거리를 주는 까닭이다. 지난달 13일 개막한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필두로,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의 카셀 도쿠멘타 14, 뮌스터 조각예술제가 10일 개막했다. 또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품 장터인 바젤아트페어가 15~18일 열릴 예정이다. <한겨레>는 그랜드 투어의 핵심인 카셀과 뮌스터의 미술제를 나눠 소개한다.

철로가 가로놓인 컴컴한 지하 역사 속에 세계 현대미술 작가들의 난장이 펼쳐졌다. 플랫폼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작가가 천막을 치고 드로잉을 펼쳐 보였고 철로 끝에서는 지구촌 역사를 다기한 이미지들로 보여주는 동영상이 상영됐다. 퀴퀴한 냄새와 냉기가 흐르는 폐역사에서 벽면 곳곳의 낙서 광고판들과 함께 오늘날 현대미술 최전선의 작품들을 보는 느낌이 야릇하다.

이곳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독일의 현대미술제 카셀 도쿠멘타 14의 주요 전시장 중 하나인, 중앙역 광장 지하 플랫폼을 개조한 특설관. 지난 9일 개막 하루 전 찾은 이 특설관은 역사 광장 위에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놓아 들어가는 얼개부터 눈길을 끌었다. 컨테이너 안에 뚫린 지하도로 들어가면 흑인 학생들이 교사에게 거세게 항의하며 물건을 집어던지는 충격적 장면을 담은 이키야란 작가의 영상물 <월요일>이 먼저 눈을 때린다. 계단을 내려가면, 콜카타에서 온 인도 작가가 대지를 계속 드로잉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천막 전시실이 플랫폼 위에 자리잡고 있다. 철로 마지막 침목이 놓인 곳에는 영상관이 차려져 미셸 오데르란 작가가 미국과 유럽의 제국 역사를 미술사적 명품과 현재 세계사적 사건의 동영상 등을 통해 보여주는 <제국의 과정>이란 작품을 틀고 있다.

지하철도가 바깥으로 이어지는 곳엔 그리스 작가 크사고라리스가 <환영문>이란 제목으로 환영한다는 그리스 말이 적힌 간판과 깃발을 터널 입구에 세워놓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그리스 병사들의 공동체에 얽힌 이야기와 그들이 당시 불렀던 노래 등을 틀어주었다.

폴란드 출신의 천재 큐레이터 아담 심치크가 ‘아테네에서 배운다’는 주제를 내세운 이번 카셀 도쿠멘타는 이처럼 잡다하면서도 개별적인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에 서린 낯선 역사적 맥락들을 호출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예술만세’란 주제 아래 다기하게 펼쳐지는 예술가들의 삶과 몸짓들을 담은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달리, 9월 중순까지 펼쳐질 카셀의 미술잔치는 ‘오늘날 동시대 이미지에 얽힌 생각과 과정들을 연출하고 기록한다’는 도쿠멘타의 의미를 지구촌 공동체의 위기상황이란 현시점에서 새롭게 변주하려는 노력으로 읽혔다.

1955년 화가 아르놀트 보데의 주도로 창설된 카셀 도쿠멘타는 70년대 작가 요제프 보이스와 대기획자 하랄트 제만 등이 68학생혁명의 급진적 사회적 이상과 전위정신을 적극 수용하면서 오늘날 세계의 현상을 진단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한 미술행사로 인식되어왔다. 심치크는 이런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서구적 잣대로만 재단되어온 현대미술계에서 동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변방의 낯선 미술언어와 역사적 유산들을 전시장에 대거 끄집어냈다. 이를 통해 난민, 인종, 젠더, 빈부차 등으로 형성된 경계와 영역에 대한 성찰과 도발을 이야기한다. 그리스 아테네 전시를 공동 주최해, 본전시에 앞서 4월 아테네 전시(7월16일까지)를 먼저 개막한 것도 유럽 문명의 고향이자, 현재는 지구촌 경제위기의 단면이 드러난 곳인 변방 그리스에서 미술의 과제와 역할을 고민해보자는 뜻이다. 주 전시장인 프리드리히 광장에 있는 유럽 최고의 공공미술관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옆에는 이런 메시지를 반영하듯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타 미누힌이 금서들만 모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모양새를 재현했다. 금서와 이에 얽힌 역사를 반영하는 오마주로서 블랙리스트 사태를 겪은 한국의 문화인들에게는 더욱 의미심장한 상징물로 다가올 법한 작품이었다.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타 미누힌이 카셀 주 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옆 광장에 만든 대형 설치작업 책의 파르테논. 역대 금서들을 쌓아 올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모양새로 만들었다.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타 미누힌이 카셀 주 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옆 광장에 만든 대형 설치작업 책의 파르테논. 역대 금서들을 쌓아 올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모양새로 만들었다.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에 나온 출품작들도 아테네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을 대거 간추린 것이었다. 여기 있는 20세기 현지 작가들의 모더니즘 작품과 최근 수집한 세계 각국 작가들의 작품들만으로 지금의 문명적 상황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작품들이 일관된 맥락이 없고 산만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는 측면에서 기획의 의도는 충실히 반영된 듯 보였다. 한국 대우조선에서 만든 유조선들의 항해 역사를 담은 앨런 세쿨라의 아카이브적 사진들이나 철조망 더미, 고문당한 피해자의 알몸상 등을 통해 군사독재 시절의 억압을 이야기하는 그리스 작가들의 설치작업, 유민, 유랑의 삶을 담은 유일한 한국 출품 작가 김수자씨의 보따리 등을 통해 관객들은 주류 미술사 이면에 숨은 다양한 변방미술의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옆 도쿠멘타 홀에서 난민들이 타고 온 보트의 부서진 배 조각을 홀 중앙에 내건 멕시코 작가의 대형 설치작업 등도 이런 양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나이지리아 작가 오토봉이 기획한 생태 퍼포먼스. 생태친화적 재료로 만든 비누 등을 담은 간이 매장 형식의 판매대를 몸에 직접 착용하고 관객과 생태환경과 일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판매 행위를 하는 독특한 개념의 작업이다.
나이지리아 작가 오토봉이 기획한 생태 퍼포먼스. 생태친화적 재료로 만든 비누 등을 담은 간이 매장 형식의 판매대를 몸에 직접 착용하고 관객과 생태환경과 일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판매 행위를 하는 독특한 개념의 작업이다.
미술관 아래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나 루터플라츠 골목의 노이에 노이에 갤러리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변방의 역사나 이미지적 산물을 다룬 것이 많았다. 특히 노이에 갤러리에 거장 요제프 보이스의 펠트천, 자동차 설치작업에 잇대어 벽면을 채운 폴란드 작가 피오트르 우클란스키의 사진 설치작업 <리얼 나치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독일 나치 정권의 주요 인물들과 이들이 촉발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전사 군인들의 이미지를 히틀러를 중심으로 조합해 한 벽면에 가득 채운 이 작품은, 폭력적인 역사가 현재의 우리 일상에 남기는 이미지의 중압감,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2차 대전의 상흔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보이스의 전위적 작업과 흥미로운 대조를 보여줬다. 노이에 노이에 갤러리에 나온 타이 퍼포먼서의 동영상은 30년대 나치스 독일에 부임한 시암(옛 타이) 왕국 대사의 관련 기록을 분석해 그의 독일 동선과 외교관 활동을 몸짓으로 재현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 토탈미술관에서도 전시한 바 있는 스페인 작가 다니엘 가르시아 안두하르도 인간의 전쟁 권력다툼이 건드린 문화재 훼손과 보존의 역사를, 다양한 사진 아카이브와 곧 불태운다는 플라스틱 조각 조형물로 표현하기도 했다. 카셀 도쿠멘타의 정치적 성격을 오늘날 지구촌 상황에서 독특하고 명철하게 풀어냈다는 기혜경 북서울미술관 관장의 지적대로 심치크는 이 전시에서 현재 지구촌 공동체의 위기와 현실을 유럽의 시선이 아닌 변방의 시선들로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에 대해 좀더 잘 알아야 한다는 화두를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전시장을 돌면서 곱씹은 ‘아테네에서 배운다는 주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의적이다. 서양 고전문화의 전범으로서 우리가 익히 아는 고대 그리스의 이미지가 있고, 한편으로 외환위기와 경제위기로 유럽의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오늘날 그리스의 세계와 연동된 위기적 징후들이 있다. 심치크는 고전적 세계보다 바로 그런 현재적 상황에서의 아테네를 더 주목한 것처럼 비친다.

카셀/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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