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작가 아이셰 에르크멘이 만든 공공미술 작품 ‘물 위에서’. 뮌스터역 남쪽의 운하 수중 바닥에 철제 구조물을 가라앉혀 관객들이 그 위에서 걸어가며 수면 위를 산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뮌스터 조각프로젝트 최고의 화제작으로 꼽힌다.
“와, 우리가 물 위를 걷고 있다구!” “이건 기적이야!”
바지춤을 종아리까지 걷어붙이고 수면 위에 선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노란 머리 청춘남녀들, 흰머리 할아버지, 중년 여성까지 바지를 걷어올리고 흐르는 물 위를 걸어간다. 모두 함박웃음을 머금은 얼굴이다. 물 위를 걸어가는 발길 바로 옆엔 오리떼가 헤엄친다. 선선한 바람, 발목에 와닿는 강물의 시원한 촉감, 그리고 찰랑찰랑 부딪히는 소리까지. 물 위의 산책은 상쾌했다. 작은 민물고기들이 나타나 잠긴 발목 사이를 지나가기도 했다. 물 위를 걸었다는 예수의 기적을 체험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독일의 북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대학도시 뮌스터가 10년마다 선보이는 세계 최고의 조각·공공미술 축제 ‘뮌스터 조각프로젝트’(10월1일까지)는 명불허전이었다. 10일 개막한 이 조각제의 출품작 30여점 가운데 가장 입소문을 많이 탄 대표작 ‘물 위에서’(On the water)는 도심천 수면을 걸어서 산책하는 특전을 안겨줬다. 터키 출신으로 도시 구조와 건축을 함께 연구해온 여성작가 아이셰 에르크멘이 만든 작품인데, 눈에 딱 들어오는 실체가 없다. 도심 운하 물속 바닥에 철골 구조물을 가라앉혀 놓고 그 위를 걷게 한 아이디어를 실현한 게 전부다. 생각지도 못했던, 도심천 한가운데를 걸으면서 평소 볼 수 없던 도시의 새 풍경을 즐기게 해준다는 개념적 디자인이 감동과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행사에는 도시공간을 수놓는 공공조형물이나 환경조각 통념을 아예 벗어난 4차원적인 것들이 유난히 많다. 역사적 건축물에서 역사를 소재로 말하고 몸짓하는 퍼포먼스나 건물 바닥을 파헤친 고고학적 탐구 등 다양한 학문·예술 장르가 융화된 작업들이 대거 들어왔다. 뮌스터 프로젝트 자체가 동시대적 상황에서 조각과 공공미술의 전망을 탐구하는 데 역점을 두어왔지만, 올해의 시도들은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다. ‘매혹적으로 늙은, 짜릿하게 젊은’이란 주제 아래 디지털 시대 소외된 몸을 탐구해보겠다고 이 행사의 40년 터줏대감인 총감독 카스퍼 쾨니히가 밝혔기 때문이다.
철거를 앞둔 아이스링크 경기장 바닥을 파헤쳐 미지의 발굴 현장처럼 만든 프랑스 거장 피에르 위그의 거대 설치작업. ‘앞선 삶 이후’라는 제목이 붙었다. 건축, 토목, 고고학, 생물학, 지형학 등 다양한 학제적 상상력으로 대지와 공간을 재해석한 역작이다.
이런 흐름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엘베엘(LWL) 미술관 근처의 옛 시의회 공회당에서 만났다. 루마니아 작가 알렉산드라 피리치와 배우들의 퍼포먼스 ‘새는 영토들’이었다. 고풍스런 공회당 안에서 배우 대여섯명이 무리를 지어 관객을 맞는다. 그들은 한 사람씩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로 시작하는 독백을 한다. 유럽의 현 국경 개념을 확정한 17세기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진 뮌스터와 시청의 역사를 말하고, 관객들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 무엇이 관심사냐고 질문하고 대화한다. 퍼포먼스가 열리는 방은 과거 도시를 다스렸던 시의원들의 회합 장소였고, 300여년 전 사형당한 죄수의 손가락뼈와 당대 여성의 장식신발이 전시된 곳이다. 이 유구한 공간에서 배우들은 역사와 일상을 이야기하며, 바닥에 누워서 몸을 뒤척이며,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에르크멘의 수면 산책과 더불어 화제가 된 프랑스 거장 피에르 위그의 설치작업도 파격적이다. 그는 뮌스터 서북쪽 변두리의 공학산업단지에 있는, 철거 직전의 옛 아이스링크 바닥을 통째로 파헤쳐 미지의 발굴 현장처럼 만들어놓았다. ‘앞선 삶 이후’란 제목의 이 작업은 건축, 토목, 고고학, 지형학 등 다양한 학제적 상상력으로 대지와 공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했다.
디지털 혁명에 맞춤한 공공미술의 공감각적 확장도 시도됐다. 캠프라는 작가그룹은 2차대전 때 부서진 뮌스터의 옛 극장 건물 잔해 옆에 지어진 새 극장 공간 사이에서 음악영상 놀이를 펼쳤다. 줄에 연결된 기기의 버튼을 누르면 일렉트로닉 음악이 울려나오는 가운데 옛 극장 건물 잔해를 둘러보게 된다. 다른 구석에 있는 기기의 버튼을 누르면 맞은편 건물 3층 창에 설치된 영상을 통해 마치 실제 인물처럼 등장인물이 나와 손을 흔드는 등의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구시가 북쪽의 공원에서는 술 마시고 널브러져 몸이나 다리에서 물안개나 물줄기를 뿌려대는 니콜 아이젠먼의 코믹한 만취 인물상들도 만날 수 있다.
올해 뮌스터는 디지털 시대 다른 장르와 융합되면서 더욱 기발하게 진화한 시각예술의 혁신적 단면들을 공공미술의 확장된 틀 속에서 보여주었다. 10년 준비 기간, 카스퍼 쾨니히와 수년간 한몸처럼 동고동락한 공동기획자들, 조력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시 공무원들과의 오랜 협업, 스스로 답사팀을 꾸린 시민들의 열정이 동시대 호흡에 충실한 프로젝트의 전통을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운하의 물 위를 걸으면서, 작가적 상상력만 내세웠다가 악평에 휩싸였던 서울역 고가공원 ‘슈즈트리’의 풍경이 내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카셀/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