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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왼손의 재발견

등록 2017-06-30 19:55수정 2017-06-30 20:56

[토요판] 김미경의 그림나무
(13) 왼손이 펜을 만났을 때
왼손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다 룸메이트가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를 그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고양이는 내 왼손 작업의 좋은 모델이 되어 주었다. 왼손으로 그린 룸메이트 고양이 1~10, 2017년 6월, 펜, 15×15㎝
왼손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다 룸메이트가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를 그려보기로 마음먹었다. 고양이는 내 왼손 작업의 좋은 모델이 되어 주었다. 왼손으로 그린 룸메이트 고양이 1~10, 2017년 6월, 펜, 15×15㎝

맨날 가느다란 펜으로 후벼 파듯 그리다 오른손과 팔에 탈이 났다. 벌써 세 번째다. 한참 늦은 오십 살 넘어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 시작했으니, 무조건 열심히 그리자 싶었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는, 하루 10시간 이상씩 그렸다. ‘회사에서 맨날 10시간 넘게 일했는데 좋아하는 그림 하루 종일 그리는 게 뭐 대수야?’ 하는 맘이었다. 1년쯤 지났을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너무 아파 오른손으로 펜을 들 수 없었다. 그때 떠올린 게 ‘왼손으로 그리기’였다. 오른손으로 그려놓은 그림을 왼손으로 베껴 그려봤다. 삐뚤빼뚤, 울퉁불퉁, 날것의 느낌! ‘오른손을 못 쓰게 될 비상시를 대비해 열심히 그려봐야지!’ 마음먹고 몇 장 그렸지만, 오른손이 낫자마자 팽개쳐 버렸다.

또 오른손이 아프고 나서야 ‘왼손으로 그리기’가 다시 생각났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했던가? 오른손이 아파 그림을 못 그리게 되자, 손에 가시가 돋을 것 같았는데 ㅍㅎㅎㅎ, 왼손으로라도 매일매일 그릴 수 있어 좋았다. 한참을 그려도 아프지 않으니 더 좋았다. 오른손으로 그릴 때와는 전혀 다른, 거세되지 않은, 문명화되지 않은 느낌의 울퉁불퉁한 선이 나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훈련되지 않은 왼손 근육이 내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야성을 쑥쑥 밀어내 보여주는 느낌 같다고나 할까.

‘왼손으로 그렸으니까’라는 면죄부를 받고, 왼손 그림은 더 자유로워졌다. 똑바로 선을 긋지 않아도 된다는, 세밀하게 후벼 파듯 그려내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선은 신바람이 났다. 비뚤어지든 말든, 튀어나가든 말든, 과감하게 선을 팍팍 그어댔다. 왼손으로 그은 꿈틀거리는 선은 내 눈에도 오른손으로 그은 선들보다 더 생동감이 느껴졌다. 예측할 수 없는 자유로운 선들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해줬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기자 생활을 오래한 탓인지 그림을 그리면서 ‘사실 보도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혼자 한참 시달렸었다. 내용인즉슨 창문이 6개 달려 있는 건물을 그리면서 간격을 잘못 잡아 5개만 그렸다 치자. 속으로 ‘아~ 건물 주인이 보면 저 창문이 5개가 아니란 걸 알아차릴 텐데. 어쩌지~’ 하며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훈련되지 않은’ 왼손 근육으로는 세밀한 표현이 불가능해, ‘후벼 파고 싶은’ 욕심을 애초에 접을 수밖에 없는 일. ‘후벼 파기’를 중단하자 신기하게도 물체의 굵직한 이미지와, 느낌과, 새로운 선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의 완성에 집착할 때는 알 수 없었던, 선 굵은 새로운 구도와 명암도 보이기 시작한 게다. 그동안 그릴 엄두를 잘 못 냈던 움직이는 동물도, 사람도, 막 그려보고 싶어졌다. ‘왼손으로 그리는데 못 그려도 부끄러울 게 없잖아!’ 싶은 맘이, 새로운 소재에 도전하게 해준 셈이다.

왼손에 대한 억압을 멈췄을 때
자유롭고 매혹적인 선들이,
그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전혀 뜻밖의 선들이 줄을 이어
모습을 드러내리란 상상도 해본다

왼손잡이는 세계 인구의 10%쯤 된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억압돼 성장을 멈춘 왼손잡이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게다. 나도 어릴 때 왼손잡이였다. 왼손 쓰는 현장을 부모님에게 들켜 여러 번 혼나면서 글씨 쓰기, 그림 그리기는 일찌감치 오른손으로 바꿨다. 가위와 칼은 여전히 왼손을 쓰고 있지만, 세밀한 그림을 그릴 정도는 아니다. 뒤늦게 내 왼손이 그려내는 ‘용감한’ 선들을 보면서,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선들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갔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단지 왼손에 대한 억압 때문에만 말이다. 왼손에 대한 억압을 멈췄을 때,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자유롭고 매혹적인 선들이, 그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전혀 뜻밖의 선들이 줄을 이어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상상도 해본다.

화려한 색깔의 색종이를 이리저리 오려 붙이는 앙리 마티스(1869~1954년)의 독특한 작품은, 나이 들고 몸이 아파 붓 들기가 힘들어진 마티스가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오른손이 아파 그려본 내 어설픈 왼손 그림이, 오히려 더 깊고 자유로운, 새로운 내 목소리를 찾아내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해 본다. 아무래도 왼손도 곧 아파질 것 같아, 오른쪽 발가락 운동 좀 열심히 해둬야겠다. ㅍ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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