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거장 김환기는 왜 부산작가와 난투극을 벌였나

등록 2017-07-12 17:59수정 2017-07-15 02:35

피난 시절 임시수도 부산의 미술판 분위기 되살린 이색기획전 열려
부산시립미술관의 ‘…토벽동인’전과 ‘신사실파…’전 눈길
갈등, 반목했던 국내 대표화가들과 지역 화가들의 60여년 전 전시 재조명
1953년 부산에서 열린 신사실파 전시에 참여했던 백영수 작가의 출품작 <장에 가는 길>. 당시 출품작을 2010년 다시 그린 것이다.
1953년 부산에서 열린 신사실파 전시에 참여했던 백영수 작가의 출품작 <장에 가는 길>. 당시 출품작을 2010년 다시 그린 것이다.
날벼락처럼 주먹이 날아왔다. 앞서가는 추상미술가로 주가를 올리던 화가 김환기는 갑작스런 일격에 코피를 줄줄 흘리며 나동그라졌다. 당하고만 있을 그가 아니다. 주먹 휘두른 낯선 사내를 붙잡으며 엉겨붙었다. 주먹다짐을 주고받는 난투극. 예술인들이 모인 다방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때는 1953년 여름. 휴전으로 환도를 앞둔 임시수도 부산 광복동의 한 다방에서는 훗날 야사에 오르내린 희대의 주먹다짐이 벌어진다. 화단의 기린아 김환기(1913~1974)를 다짜고짜 때린 이는 당시 부산지역 작가 서성찬(1906~1958). 서울서 피난온 작가들에 대한 지역 미술인들의 울분과 질시가 쌓여 폭발한 해프닝이었다. 자신과 김경, 임호 등 부산 지역 작가들이 결성한 ‘토벽’ 동인은 다방을 전전하며 전시장을 구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김환기, 장욱진 등 피난온 ‘서울 작가’들은 광복동 임시 국립박물관에서 ‘신사실파’ 동인전을 여는 특혜를 받은 것이 알려졌다. 게다가 미국대사관 쪽이 작품을 구입해주고 물감, 종이 등의 화구까지 사줬다는 소문이 퍼지자 부산 작가들은 격앙됐고, 감정을 누르지 못한 서성찬이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로 번진 것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이 지난 5월부터 차린 ‘신사실파, 추상미술의 지평’전과 ‘부산미술, 그 정체성의 출발: 토벽동인’전은 64년 전 난투극의 배경이 된 피난시절 부산의 양대 미술세력을 재조명하는 전시회다. 부산 미술인들이 처음 결성한 ‘토벽’ 동인과 피난온 서울 화단 중심 미술인들의 추상동인 ‘신사실파’의 주요 작품들이 마주 보는 전시장에 내걸렸다.

신사실파는 해방 뒤인 1947년 국내 추상주의 계열 화가들이 최초로 만든 동인이다.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주도해 ‘새로운 사실(寫實)을 표방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1948년 첫회 동인전을 치렀고, 이듬해 장욱진도 참가하며 2회 전시를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온 이들은 53년 5월 부산 광복동 국립박물관에서 ‘3회 신사실파전’을 열면서, 당대 유력작가인 백영수, 이중섭을 추가로 합류시켰다. 당시로서는 첨단 화풍을 이끌었지만, 추상화의 본향인 서구의 흐름과 거리를 두고 한국의 자연이나 전통과의 결합을 통한 ‘토착화한 추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피난 시절 화단의 눈길을 모았다.

반면, 토벽회는 53년 3월과 10월 부산 시내 다방에서 1, 2회전을 열면서 추상을 배격하고, 민족적 형상성을 내걸었다. 토박이란 뜻을 지닌 ‘토벽’은 신사실파를 비롯한 중앙 화단 피난 작가들에 대한 강한 대결의식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며 형상회화라는 부산 지역의 특유의 화풍을 닦는 데 모태가 된다.

부산 지역 미술동인 ‘토벽’의 작가였던 서성찬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경>(1957). 언덕과 산을 중심으로 위아래 하늘과 집들을 짜임새 있게 배치한 화면의 구성력과 탁월한 색채 감각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수작이다.
부산 지역 미술동인 ‘토벽’의 작가였던 서성찬의 대표작 중 하나인 <풍경>(1957). 언덕과 산을 중심으로 위아래 하늘과 집들을 짜임새 있게 배치한 화면의 구성력과 탁월한 색채 감각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수작이다.
두 전시장에서는 신사실파 동인인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의 작품 29점과 토벽 동인인 임호, 김윤민, 김종식, 서성찬 등의 작품 22점을 당시 리플릿, 홍보물, 사진 등의 아카이브와 함께 구경할 수 있다. 출품작들이 대부분 망실돼 당시 전시장 모습이 충실히 재현된 것은 아니다. 신사실파전의 경우 산과 하늘 등이 등장하는 김환기의 50년대 대표작들과 장욱진 특유의 단순소박한 필치로 자갈치시장을 그린 작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중섭의 50년대 초반 작품 <뱀과 태양> 등이 나왔다. 요절한 이규상 작가의 50~60년대 에너지 넘치는 추상 구성 작품들이 재발견의 감흥을 안긴다. ‘토벽’전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난투극의 주인공 서성찬의 작품들이다. 부산의 풍물과 경관을 주로 그린 그의 <언덕> <정물> 등의 작품들은 경치와 사물을 탁월한 구성력으로 화면에 배치하고 있고, 다채롭고 세밀한 색감 등도 인상적으로 와닿는다. 당시 국내 화단에서 이 정도의 화면 구성력과 색채감각을 지닌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게 김영순 관장의 평가다. 임호의 인물 초상들과 부산 대표작가로 지역 화단에 이름 높은 김종식의 항구 풍경화 등도 눈에 들어온다. 당시 광복동, 남포동 등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집결지 노릇을 했던 다방과, 국립박물관 옛 자리 등에 대한 지도패널을 설치해 이해를 도왔다. 한국 화단 초창기 민족주의적 집단의식과 구상 추상 미술운동의 밑돌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부산 피난 시절의 미술계를 재조명한다는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 전시마당이다. 그럼에도, 출품작 아닌 후대 작품들로 대부분 채워진 전시는 장기간의 아카이브 수집 조사를 통한 미술사 전시의 본령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허실 또한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 8월13일까지. (051)740-4245. 부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