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 기획전 ‘빈 페이지’에 나온 박제성 작가의 가상공간 영상물 <여정>. 눈바람 날리는 설원을 배경으로 불탑과 코끼리, 물고기, 바위 등의 낯선 사물들이 잇따라 흘러가는 초현실적인 작품이다. 디지털 영상에 불교와 현대철학에 얽힌 사유를 녹여넣은 이 전시의 수작으로 꼽힌다.
올여름 청년작가들은 힘을 내어 꿈틀거렸다. ‘불끈’ 결기를 내뱉은 건지, 마당을 깔아줘 그냥 나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그들은 곳곳의 작품마당에서 다기한 개성을 발산하며 반가움을 샀다.
6~7월 서울의 화랑가와 미술관 등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내일을 짊어질 20~30대 차세대 작가군의 전시가 줄을 이었다. 서울 인사동 피맛골의 폐건물 공간에서 펼쳐진 유니온아트페어(6월23일~7월2일)를 필두로 국제갤러리의 젊은 미술가 그룹전 ‘스노우플레이크’(5월25일~7월2일), 금호미술관의 기획전 ‘빈 페이지’(5월24일~8월31일), 강남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청년작가 6인전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5월20일~7월23일), 경기도 안산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기획전 ‘참여적 전회’(5월27일~6월18일) 등이 차려졌다.
전시 비수기인 여름에 무명의 청년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주는 것은 화랑가의 오랜 관행이다. 하지만 올해 여름의 젊은 작가 전시회들은 울림이 이전과 다르다. 지난 2년간 이들의 작업과 전시들이 맥 빠진 침체 양상을 벗어나지 못했던 까닭이다. 청년작가들은 2014~15년 변두리 주택가, 공단 지역에 자기들만의 창작·전시 터전인 이른바 ‘신생공간’들을 우후죽순 열면서 국립현대미술관 청년관 신설을 요구하는 등 뚜렷한 세력화 양상을 보였다. 2015년 10월 신생 공간 10여곳이 연합해 만든 작가 장터 ‘굿즈’는 상당한 관심을 모았고, 그해 연말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신생 공간 붐의 단면을 조명한 ‘서울바벨’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청년미술가들은 활동의 지속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신생 공간들 대부분 문을 닫거나 활동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작가들이 유니온아트페어 같은 직거래 장터들을 차린 건 진입 장벽이 높은 화랑가 아트페어에 대안적, 보완적 판매장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또 제도권 화랑이나 미술관이 신생 공간에서 활동하거나 연을 맺은 차세대 작가들 상당수를 전시장에 끌어들인 건 단색조회화 이후로 내세울 만한 대안미술을 찾으려는 의도로 비친다는 점에서 맥락이 연결된다.
실제로 여름 전시에서 드러난 청년작가들의 출품작들은 디지털 환경에 기반한 낯선 이미지 감수성을 다기한 갈래로 보여주었다. ‘빈 페이지’전에 나온 양정욱, 박제성 작가의 조명·가상영상작업들이 단적인 사례다. 양정욱 작가의 작품은 실과 나무로 만든 조형물이 조명을 받아 만드는 희미한 상들이 서로 겹치거나 멀어지는 모양인데, 마크 로스코의 색면회화가 움직이며 연출되는 듯한 착시감을 연출하며 묘한 애상의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박제성 작가의 가상공간 영상물 <여정>은 눈바람 날리는 설원을 배경으로 불탑과 코끼리, 물고기, 바위 등의 낯선 사물들이 잇따라 흘러간다. 첨단 디지털 영상에 불교와 현대철학에 얽힌 사유를 초현실적인 구성으로 녹여넣은 수작으로 꼽힌다. 이 전시의 다른 출품작가들도 향이나 바람, 빛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공간에 연출하면서 관객마다 미지의 서사를 공감각적으로 유추하거나 상상하게 한다.
에르메스 전시에서는 개가 인간의 7년과 같은 1년의 시간을 경험하는 내용의 브이아르(VR)게임 영상을 만든 김희천 작가가 주목되는데, 인터넷·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장치들로 재구성된 현재의 시공간 조건을 가감없이 노출한 작업들을 들고나왔다. ‘스노우플레이크’전 또한 모바일 디지털 환경에 친숙한 최윤, 김익현 작가 등이 지나는 각도에 따라 상이 달라지는 렌티큘러, 컴퓨터·스마트폰의 단편적 이미지들을 한국 거리 풍경이나 기독교계의 휴거 소동을 배경으로 풀어낸 작업들을 선보였다.
디지털 메커니즘, 포스트 인터넷 등으로 명명되는 청년작가들의 작업 흐름은 미술자본에 의한 상품화, 현실 비판적 매체 작업 등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런 특징들을 활용해 누리집에서 일반인들의 괴담을 모으거나, 소리공동체를 조직한 ‘참여적 전회’전 같은 공공적 프로젝트들도 점차 활성화될 조짐이다. 우려도 있다. 청년기획자 안대웅씨는 “젊은 작가들의 디지털 감수성은 최근 서구에서 보편화하면서 본격적으로 들어온 트렌드지만, 충분한 논의와 담론 형성을 피하고 작품 보여주기에만 급급하는 맹점도 보인다”고 지적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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