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작 <먹방>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강영민 작가. 영화 <황해>에서 배우 하정우가 국밥을 먹는 장면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얼굴을 접붙여 그렸다. 원래 일베 회원들이 만든 합성사진을 화폭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감옥에서 끼니를 못 잇는다는 ‘그분’ 먹방이 그려졌다. 눈웃음 머금고 볼을 실룩거리면서 김을 우걱우걱 먹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 ‘흡입’하느라 벌린 입 위엔 콧수염이 듬성듬성하다. 당연히 합성된 짝퉁 이미지겠지만, 필치를 보면 표정과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동영상처럼 생동한다. 어디서 본 ‘짤방’이나 스냅 사진처럼. 그렇다. 이 그림은 영화 <황해>에서 배우 하정우가 국밥 먹는 유명한 짤방 장면을 따온 것이다.
작품 제목은 <먹방>. 지난 수년간 한국의 정치와 독재, 파시즘 등을 소재 삼아 작업해온 팝아트작가 강영민(45)씨가 2014년 득의작처럼 그렸다. 요즘 서울 홍대 앞 대안공간 루프에 차린 그의 개인전 ‘금지된 사랑’에서 가장 눈길 끄는 출품작 중 하나다. 사실 그림 속 박근혜상은 작가 발상이 아니다. 2013년 구미 박정희 생가 등을 돌며 벌인 ‘박정희와 팝아트 투어’ 당시 싸우려고 찾아온 ‘일베’ 회원들한테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일베들한테 ‘너네들도 작가와 비슷하니 작업해보라’고 했지요. 박근혜가 먹방 약하니 작품 만들어보자고 했더니 저걸 합성해줬어요. 그 이미지 바탕으로 제 캐릭터인 ‘조는 하트’ 등을 넣어 그렸어요. 한국의 유일 이데올로기 ‘먹고사니즘’을 표현한 그림이죠.”
전시장에서 국내 첫 부녀 대통령 박근혜·박정희는 팝아트 화신이 된다. 박근혜 팝아트의 핵심은 합체다. <먹방> 외에도 혁명가 체 게바라, 엘리자베스 여왕의 실루엣과 합체되어 <박게바라> <박리자베스>가 된다. 평화의 소녀상과도 합체되어 박근혜 얼굴을 한 소녀상은 ‘사랑의 처녀상’으로 등장한다. 그 옆자리 의자를 비워놓아 관객들은 인증샷을 찍을 수 있다.
박정희 팝아트는 복제다. 강건한 무인풍 글씨와 어록이 화폭에서 모양새대로 재현되어 그려진다. 다만, 배경색을 국방색으로 하거나, 글씨들 위로 물감을 질질 흘리거나 흩뿌려 팝아트 분위기를 냈다. “하사된 휘호 글씨들을 컬러 스프레이로 화폭을 더럽히면서 상스럽게 썼어요. 신격화 아니면 악마화로만 이분화되는 역사인물 박정희를 낯선 예술적 오브제(대상물)로 보고 싶었던 거죠.”
1999년 루프 창립 당시 초대 큐레이터였던 그는 애초 한국 현대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배고픈 돼지’ ‘조는 하트’ 등 명랑 캐릭터 작업을 하면서 전시기획, 애니메이션, 파티 기획 등을 했고 상업화랑 전시도 했다. ‘날라리’ 작가였던 그는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뒤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나라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움직인다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한국 사회를 현장에서 뜯어보고 작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동료작가 낸시 랭 등과 한국 현대사 투어를 벌였고, 박정희·박근혜로 상징되는 파시즘을 예술화하려는 발상도 얻었지요. 덕분에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작가가 재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 글씨. 울긋불긋한 군복 이미지 위에 글씨를 본떠 그린 뒤 물감을 질질 흘려 원작과 다른 조악하고 상스러운 팝아트의 분위기를 냈다.
이번 전시는 2013년 이래 뚝심있게 벌여온 정치적 팝아트를 되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1층 벽에 슬라이드로 비치는 한국 현대사 현장 투어 사진들이 그 단초를 보여주고, 지하층은 박정희·박근혜·김정은 등의 권력자 초상이 북한 포스터, 남한 대중문화 이미지와 뒤엉킨 근작, 신작들을 통해 강 작가의 투어가 어떻게 후속 작업들로 갈무리되었는지 알려준다. 박정희·박근혜의 파시즘적 이미지를 신물나게 복제해 낯선 사물로 보이게 만드는 팝아트 특유의 화법에 투어 등에서 집요하게 수집한 박정희 일가 역사자료들에 대한 분석과 통찰이 더해졌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아트페어나 미술관에 나온 워홀류의 ‘블링블링한’ 작업만이 팝아트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할 이유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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