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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오랜 트라우마 옛 명화로 치유 뒤 그림에 빠졌죠”

등록 2017-12-21 18:23수정 2017-12-21 22:04

[짬] 미술 강의하는 의사 박광혁씨

박광혁씨.
박광혁씨.

박광혁(46)씨는 내과 개업의다. 경기 북부 지역에서 다른 의사 1명과 함께 병원을 꾸려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 겨울부터는 오전 진료만 하고 있다. 2010년 이후 병원 밖 활동이 늘어나더니 아예 ‘반 근무’만 하게 된 것이다. 최근엔 <미술관에 간 의학자>(어바웃어북 펴냄)란 책도 냈다. 그가 오후에 하는 일은 ‘미술과 인문학 강의’다. 그를 지난 15일 서울 잠원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박광혁씨가 최근 펴낸 <미술관에 간 의학자> 표지
박광혁씨가 최근 펴낸 <미술관에 간 의학자> 표지

책은 그가 지난해 9월부터 서양미술사 학습모임 ‘모나리자 스마일’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다. 질병이란 창을 통해 서양 명화를 들여다보는 글들이다. 책은 많은 명화들이 화가나 주변 인물이 겪는 고통에 기반해 있음을 새삼 일깨운다. 오랜 기간 부동의 경매가 1위였던 <가셰 박사의 초상>(빈센트 반 고흐 작)은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화가가 자신보다 더 우울해 보이는 의사를 그렸다.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커피포트>를 보자. 파리 매춘부들은 유전병으로 성장이 멈춘 짧은 다리와 큰 머리, 통통한 몸을 지닌 화가를 ‘커피포트’란 별명으로 불렀다. 질병이 만든 그림인 셈이다.

의사인 저자가 간결하게 맥을 짚어 전하는 질병의 역사는 그림의 의미를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번 책은 (모나리자 스마일) 강의 내용 중 30분의 1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해 문학이나 역사 등 다양한 강의를 했어요. 강의 뒤 복습하는 차원에서 강의 내용을 밴드에 올렸더니 회원들이 책으로 내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의학과 미술을 합친 강의 반응이 가장 좋아 먼저 냈죠.”

서양미술사 동호회 ‘모나리자 스마일’ 회원들이 박광혁(맨 오른쪽)씨의 강의를 듣고 있다. 사진 박광혁씨 제공
서양미술사 동호회 ‘모나리자 스마일’ 회원들이 박광혁(맨 오른쪽)씨의 강의를 듣고 있다. 사진 박광혁씨 제공

강의에 나선 건 2010년 무렵이다. 처음엔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업계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위·대장내시경학회 회원을 대상으로 첫 강의를 했죠.” 그의 강의를 들은 이들이 의기투합해 지난해 ‘모나리자 스마일’ 모임을 만들었다. “매주 금요일 서울 역삼역 근처에서 두시간씩 강의를 합니다. 회원 70명 중 평균 40여명이 출석해요. 화가도 있고 주부, 그림 수집가, 딜러, 의사들도 계시죠. 주말엔 회원들과 함께 미술관 관람도 갑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고1 때 87년 신촌 시위현장에서
이한열 열사 사망 목격 뒤 고통
4년 뒤 ‘자유의 여신’ 그림 보고 치유

2010년부터 미술·인문학 강의
지금은 ‘오전 진료·오후 강의’
강의 토대 ‘미술관에 간 의학자’ 내

그가 미술에 빠지게 된 사연은 좀 특별하다. “87년 6월항쟁 때 신촌에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몇미터 근처에서 봤어요. 당시 고교 1학년이었어요. 수유리 집에서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시위대에 섞였죠. 쓰러지는 걸 보고 바로 도망갔어요. 그 뒤로 한참 몸이 아팠어요. 열이 나고 몸이 힘들었죠. 쓰러진 사람이 이한열이라는 것은 대학에 들어간 뒤 뒤늦게 알았죠.” 한양대 의대 2학년을 다니던 91년 여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을 봤어요. 87년 상황이 겹쳐졌죠. 깊은 감동을 받았고 오랜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는 프랑스 7월혁명에 참여한 민중의 분노를 표출한 이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엿봤다고 고백했다. “(그림 속) 혁명에 참여한 꼬마와 저를 동일시했죠. 저는 당시 도망갔지만 내면엔 시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 미안함 때문에 이 작품에 더 끌린 것 같아요.”

프란시스코 고야의 <디프테리아>
프란시스코 고야의 <디프테리아>

이 경험은 그에게 그림엔 각각의 이야기와 시대 배경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집에 2천권의 미술책이 있어요. 지금도 남는 시간엔 서점에 들러 웬만한 미술책은 다 사서 봅니다.” 부모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지만 고교 때 꿈은 기자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일리아드> <오디세이>와 같은 서양 고전 문학을 고교 시절에 탐독했단다.

질병이 짙게 투영된 그림의 감동을 말하면서 그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 <디프테리아>를 예로 들었다. 아버지가 급성 감염병 ‘디프테리아’로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려고 기도 확보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림이다. “지금은 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예전엔 치유가 힘들어 고통을 겪었던 모습을 보면서 수강생들이 울기도 해요. 그림을 보며 현재의 고통이 치유되는 느낌을 얻기도 하지요.”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커피포트>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커피포트>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낭만파 거장 들라크루아입니다. 결혼도 안 하고 결핵으로 죽었죠. 이상이나 김유정처럼요. 그가 그린 쇼팽 초상화가 루브르에 있어요. 극적이면서도 절제되어 있죠. 그림마다 스토리가 있고 동료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았던 화가입니다.” 질병이 예술에 가장 깊게 투영된 화가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 루트비히 키르히너가 떠오릅니다. 처음엔 히틀러에게 충성했으나 나중에 퇴폐미술가로 규정되면서 너무 괴로워 권총자살을 했어요. 기본 질병은 모르핀 중독이었죠. 좌절과 배신감이 그림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두번째 책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화가들과 그 작품에 대해 써볼 계획이다. 계획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생활고에 찌들지 않으면서 계속 국내외 미술관을 다니는 것이죠. 중고생들에게 강의도 하고 싶어요.” 의사이지만 자녀가 다섯이어서 생활이 여유있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그림 도판 어바웃어북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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