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예르미타시 박물관전,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 열리고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프랑스 회화·조각·소묘 등 미술품 89점이 내년 4월15일까지 전시된다. 18일 열린 언론공개회에서 한 참석자가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서양 미술사 400년을 주도한 프랑스 미술의 최고 명소를 고른다면, 누구나 파리의 루브르미술관과 오르세미술관을 꼽게 마련이다. 그러나 좀더 눈썰미가 있는 이들이라면 한 곳을 더 지목할 것이다. 바로 러시아 옛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개조해 만든 예르미타시 박물관이다.
앵그르의 인물초상 대표작 중 하나인 <니콜라이 구리예프 백작의 초상>(1821). 이탈리아 등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러시아 귀족의 당당한 자태를 담았다. 강렬한 이목구비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예르미타시는 18세기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 회화들을 대거 수집하면서 컬렉션 초석을 놓은 뒤로 황제, 귀족, 기업가들이 수집한 17~20세기 프랑스 미술품 1100여점을 소장해왔다. 러시아 혁명으로 모든 개인 컬렉션이 국유화한 덕분인데, 프랑스 밖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프랑스 미술품 보고’로 보면 된다. 특히 마티스의 <춤>을 비롯해 밀레, 세잔, 고갱의 걸작들이 포함된 19세기~20세기 초 컬렉션은 인상파와 이후 근대미술사조를 섭렵하기 위해 꼭 가봐야 할 곳으로 거론된다.
이 명망 높은 예르미타시의 프랑스 컬렉션이 연말 한국에 날아왔다. 19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막을 올린 특별전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다. 예카테리나 2세와 황제, 귀족, 기업가들이 수집한 17세기~20세기 초 회화, 조각, 소묘 등 89점이 선별된 특별한 프랑스 미술 잔치다.
17세기 풍경회화의 대가였던 클로드 로랭의 <이탈리아 풍경>(1648). 로랭은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나 고대유적의 폐허와 어우러진 자연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당대 유럽 수집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출품작이 많은 건 아니지만, 전시장은 17세기 바로크시대 이래 400년 프랑스 미술사를 사조별로 모두 둘러볼 수 있게 꾸며졌다. 17세기 고전주의, 18세기 로코코와 계몽주의, 18세기 말~19세기 초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의 인상주의·상징주의·원시주의·야수주의 사조를 각각 영역을 나눠 작품들을 선보이는데, 미술사에 명기되는 시대별 주요 대가들의 작품들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17세기의 경우 바로크 시대 고전주의 거장인 니콜라 푸생의 성화 <십자가에서 내림>이나 목가적 전원풍경화로 성가를 얻은 클로드 로랭의 <이탈리아 풍경> 등을 통해 ‘세상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공식’으로서 미술을 대했던 고전주의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 18세기 로코코 시대는 요염한 여인의 초상을 주로 그렸던 프랑수아 부셰가 우아하고 부드러운 필선의 <다리 건너기>란 풍경화로 관객을 맞는다.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그랜드투어의 대상이 됐던 고대 로마 유적지를 정교하게 담은 샤를루이 클레리소의 고고학적 스케치들은 계몽주의 시대 상류층의 내면 의식을 반영한다. 19세기 영역에서는 앵그르가 그린 러시아 귀족의 신고전주의 초상화나 죽은 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은 쿠르베의 작품, 인상파의 선구가 된 카미유 코로의 풍경화들이 나왔다. 19세기 말 고답적인 고전양식에 사진으로 찍은 듯한 여성 누드의 관능미를 가미한 장 레옹 제롬의 <고대 로마의 노예시장>이나 쥘 조제프 르페브르의 막달라 마리아 성화 등은 인상파와는 다른 맥락에서 세기말 프랑스 화단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기도 하다.
나비파의 화가였던 모리스 드니가 1896년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실제 자연의 색감과는 전혀 다른 상징주의 화풍으로 성서의 한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예르미타시 박물관의 후기인상주의 컬렉션의 대표적인 명작 중 하나다.
전시 말미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상징주의 컬렉션은 앞선 전시영역의 작품들과 취향과 구성 면에서 극도의 이질성을 보여준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의 건초더미>를 비롯해 폴 세잔의 <마른강 기슭>, 나비파(19세기 말 고갱에게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결성한 그룹)의 거장 모리스 드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등이 그렇다. 모스크바의 직물 기업가였던 모로조프와 슈킨이 청장년 시절 서구를 드나들며 사 모은 명품들로, 러시아 혁명 뒤 압수되어 예르미타시에 모인 것들이다. 미하일 표트롭스키 관장은 전시개막 인사말에서 “슈킨과 모로조프 컬렉션에는 (그들이 활동했던) 모스크바의 멋이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명품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수집한 당대 러시아 소장 컬렉터들의 창의적이고 신선한 감각이 미술사의 새 지평을 열었음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내년 4월15일까지. (02)2077-90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