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서 만난 배명지 학예사.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퍼포먼스 사진작업 앞에서 자신의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몸짓이 어떻게 우리 삶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지를 예술가들의 시도를 통해 보여주려는 게 전시의 주된 목적”이라고 했다.
“전시 시작할 때는 항의 민원이 들어올까봐 더 맘을 졸였어요. 알몸, 성기를 노출하거나 과격한 메시지를 드러낸 작품이 많거든요. 뜻밖에도 관객들 반응이 호의적이어서 놀랐습니다.”
연말과 연초 국내 미술판에서 최고의 화제 전시로 떠오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기획전 `역사를 몸으로 쓰다’의 기획자 배명지(47) 학예사는 호평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지난해 9월 개막한 `…몸으로 쓰다’전은 국내외 예술가들의 영상, 사진, 설치 등 작품 70여점을 통해 몸짓이 어떻게 현실의 삶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형 기획전이다. 백남준과 오노 요코, 아이웨이웨이 등 세계 주요 작가들의 퍼포먼스 작업 등을 원형 전시장에 ‘퍼포먼스 명작 백화점’처럼 빙 둘러 소개한 얼개가 특징이다.
행위예술의 거장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출품작 <발칸연애서사시>의 일부분. 발칸의 여인들이 가슴을 드러낸 채 주무르면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담았다.
21일 막을 내리는 이 전시는 석달이 지났는데도 국내외 호평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코보소셜>이란 홍콩 예술매체는 지난해 아시아 미술의 주목할 만한 10대 전시 중 네번째로 꼽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아카데미 디렉터는 순회전을 제안하기도 했다. 접근성이 안 좋은 과천관 유료전시인데도, 현재까지 7만명 넘는 관객이 찾은 것도 이례적이다. 공공기관에서 파격적인 성 표현, 정치·사회적 메시지 등이 넘치는 전시를 기획한 것이 논란을 부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기우였다.
“사회나 정치가 억압하거나 트라우마(정신적 상처)가 커서 몸짓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역사를 이야기한 작업들을 주목한 거죠. 규제나 억압은 몸을 통해 새겨지므로 역으로 그를 이야기할 가장 적합한 매체가 몸짓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런 의도가 공통된 몸을 지닌 관객들에게도 와닿은 것 같아요.”
몸에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미술계에서 손꼽히는 미디어아트 기획자다. 2015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는 코리아나미술관의 큐레이터로 활약했다. 코리아나에서 기획한 `퍼포밍 필름’(2010), `댄싱마마’(2015) 등의 전시는 퍼포먼스, 페미니즘 등의 담론을 제시하는 수작으로 입소문이 났다.
배 학예사는 예술가들이 몸으로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법을 역사적으로 다채롭게 펼쳐놓는 데 주력하며 전시틀을 짰다고 한다. 1968년 <한강변의 타살> 퍼포먼스를 하며 국전과 기존 미술계 제도를 비판했던 국내 전위 미술인들과 백남준도 참여했던 일본의 하이레드센터, 공공장소에서 전위적인 알몸 작업을 선보였던 제로 지겐 등의 작업들을 서구 거장들의 작업과 함께 놓아 보편적 맥락에서 비교할 수 있게끔 했다. 그는 오랜 문화적 전통이 축적된 몸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출품작으로 거장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발칸연애서사시>를 꼽았다. 비가 쏟아지는 발칸의 대지에서 치마를 걷어올려 성기를 내보이며 비를 받아 안으려는 여인들의 몸짓 등을 내보인 이 영상작업들은 대자연과 교접하는 성의 초월적인 면모를 표출한다. 그는 “발칸반도의 성 풍속을 담은 옛 문서를 작가가 오래 탐구하고 분석해 나온 작품”이라며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와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뼈와 살을 갈아서 행복하게 전시를 했다”고 털어놓은 배 학예사는 현재 싱가포르, 일본 등의 국립미술관과 함께 2019년 전시를 목표로 ‘문화변동과 아시아 현대미술’ 프로젝트의 실무 기획도 맡고 있다. 정치적 억압 등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작업해온 한국과 아시아 퍼포먼스 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춘 전시를 해보는 것도 앞으로의 소망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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