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전에 나온 장영혜중공업과 일본 작가 고고 다쿠지의 ‘어 러브 슈프림’. 북한 유명인사인 리춘희 아나운서가 검은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전광고 형식의 텍스트들이 뒤덮는 작품이다. 혁명을 명명하는 대상의 실체가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하는 아이러니를 풍자한다.
‘혁명’은 따뜻한 것인가, 차가운 것인가.
지난 연말부터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1, 2층에 마련된 2개의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전시는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한다. 혹한이 몰아친 24일 찾은 1층 들머리엔 ‘혁명은 티브이(TV)에 방송되지 않는다’라는 전시 제목이 붙어 있었다. 온기가 감도는 전시장 안쪽에선 작품들 사이를 유랑하는 관객들이 눈에 띈다. 전시장에 마련된 헤드폰을 끼고 소리와 음악이 들리는 특정 지점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소리꾼 권병준 작가가 만든 <오묘한 진리의 숲>이다. 공사장 잔해 같은 설치작품들과 가림막을 지나, 거리의 투쟁 영상이 명멸하는 화면들을 보며 걷는 중에도 귀에선 계속 다른 음향이 들린다. 애잔한 기타 반주의 합창곡 ‘베인 나무여’, 고독한 별똥의 운명을 읊조린 ‘별똥별’ 등의 노래가 흘러나왔다가 몇 걸음 옮기자 지난해 광화문 광장을 진동시킨 함성 ‘박근혜 퇴진하라’가 터져나왔다. 전시장 안쪽으로 가면 여수의 밤벌레 소리와 남해 용문사에서 녹음한 스님들 염불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내면의 혁명, 그 가치를 일깨워주는 소리와 메시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었다.
‘혁명은…’전은 이처럼 내면의 소리와 실제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거센 외침을 함께 담아 혁명의 다기한 의미를 풀어나간다. 양지윤 기획자는 “혁명은 인간의 소리에서 시작된다. 다국적 작가 13팀이 소리를 통해 지금 시대 혁명이 무엇인가를 탐험하는 자리”라고 했다.
전시장은 혁명이 일어난 거리 공간으로 해석된다. 세계 곳곳에서 혁명과 투쟁을 외치는 소리,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펼쳐놓은 트인 얼개다. 북한 유명인사인 리춘희 아나운서가 검은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애니메이션을 선전 광고 형식의 글자 텍스트들이 뒤덮는 장영혜중공업과 일본 작가 고고 다쿠지의 미디어아트 <어 러브 슈프림>이나 촛불혁명·68혁명에서 불린 노래들을 들려주는 메가폰을 나무 구조물 중심에 놓은 김기철 작가의 <마트료시카> 등 독특한 미디어 작업들이 도처에 있다. 다만, 한 공간에 여러 가지 사운드와 이미지를 뭉뚱그리다 보니 혼돈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소리산책을 하는 관객들의 귀와, 날선 혁명 구호와 투쟁 영상들이 서로 충돌하곤 한다.
이우성 작가의 천그림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한 노래>. 촛불광장에 모였던 다양한 세대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통해 당시 집약됐던 변혁의 에너지를 상상하며 표현했다.
신양희 기획자가 소장 작가·연구자 10여명과 만든 2층의 ‘옥토버’전은 러시아혁명의 재해석이 화두지만, 혁명 뒤 사회주의 실현의 혁신적 수단으로 등장한 구축주의 예술에 대한 오마주란 점이 다르다. 구축주의 예술을 응용한 전시장의 작품들은, 진보적 이상을 향해 복무하는 예술에 대한 21세기 한국 청년 미술가들의 애착, 그 미래적 에너지를 이 땅에 새롭게 풀고 싶어하는 의지 등이 담겨 있다. 지난해 촛불광장의 시민들이 바람을 맞으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담은 이우성 작가의 대작은 광장의 에너지에 대한 비장한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원뿔 모양의 조형물에 러시아혁명 영상물을 투영한 강태훈 작가의 영상작업,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양말과 옷을 짓누르는 스탠드 구조물로 형상화한 손혜경 작가의 설치작품 등은 계급투쟁·계급혁명에 대한 개념적 사유를 깔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전시 전체로는 맥락이 명확하지 않고 짜임새가 느슨하다는 단점도 보인다. 연구모임 ‘아래’가 만든 러시아혁명 관련 아카이브 서재의 책들이나 이덕형·조주연 연구자가 러시아혁명기 미술의 전후사를 이야기한 대담집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31일까지. (02)760-4850.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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