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엽의 <몸짓> 연작. 기다란 반투명 천에 먹과 아크릴로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조기수 사진작가 제공
돌, 바람만큼 여자가 많기로 유명했던 제주도는 창조설화에서도 여신이 주인공이다. 제주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물음 앞에서 설문대할망이란 거신(巨神)이 등장한다. 바깥세상을 동경하던 설문대할망은 어느날 옥황상제에게 쫓겨나 바다에 발을 디디는데, 이때 치마에 담긴 흙이 주르르 쏟아지며 제주섬이 생겨났다. 그 흙이 가장 높게 쌓인 곳이 한라산, 치마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쏟아진 흙은 오름이 됐다. 한라산이 너무 높다고 생각한 할망이 봉우리를 떼어 던지자 산방산이 만들어졌으며, 한라산 움푹 팬 자리는 백록담이 됐다. 큰 몸집만큼 오줌발도 셌던 할망이 어느날 한쪽 발을 성산 일출봉에 딛고 오줌을 누자 땅 조각이 하나 뚝 떨어져 나가 우도가 생겨났다.
할망의 죽음엔 여러 갈래의 설이 있지만, 가장 슬픈 것은 아들 500명을 먹여 살리려 죽솥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다. 죽을 다 먹고 나서야 사실은 어미의 뼈와 고기였음을 알게 된 500명의 아들은 그대로 돌로 굳어버려 영실의 기암괴석이 됐다. 쌀이 나지 않고 식량이 부족해 늘 허기졌던 제주 사람들의 척박한 현실이 그대로 전해진다.
제주 동북쪽 조천읍의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설문대(設問大), 크게 묻다’는 설문대할망의 통 큰 모습을 여성 작가들의 ‘근원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한 자리다. 윤석남을 필두로 정정엽·윤희수·류준화 등 여성주의 미술계보를 잇고 있는 작가 4명이 모였다. 설문대를 한자 ‘크게 묻다’로 해석한 뒤, 숲(윤석남)·여성(정정엽)·돌(윤희수)·바람(류준화) 등 제주의 지역성을 대표하는 네가지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들의 작품에선 “아름답고 젊고 품위있는 여신보다는 크고 억세고 소탈한 하위주체인 설문대할망”의 모습이 되새김질된다.
류준화의 <돌-바람> 연작. 세찬 바람을 견디며 일하는 제주 여성들의 강인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조기수 사진작가 제공
정정엽은 여성의 ‘몸’과 ‘몸짓’에 나타난 다양한 의미를 묻는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기다란 반투명 천에 여성들의 다양한 포즈를 흑백 드로잉으로 담았다. 중년을 훌쩍 넘겨 세월의 중력을 몸으로 받아안은 벗은 여자, 벽을 짚고 통탄하는 여자, 시장 다녀오는 여자, 기다란 손톱을 섬세하게 다듬은 주름진 손 등이 걸렸다. 함께 제주 오름에서 산책을 하던 친구가 급작스럽게 전해진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듣고 바람 속에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그린 3부작 <먼 곳의 소식> <곶(숲)> <웅크린 구름>은 태연하려고 애쓰는 와중에도 담긴 불안감, 좌절이 팽팽한 긴장으로 묘사된다. 류준화의 아크릴 그림에선 설문대할망이 싱싱한 에너지를 내뿜는 젊은 여성으로 묘사된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500명의 아들을 위로하려 이 땅에 다시 발을 디딘 설문대할망의 눈물은 보석이 되어 제주도의 철쭉꽃에 내려앉고(<어머니의 눈물>), 머리를 흐트리는 바람을 견디며 돌탑을 쌓고 염소·새·말과 친구가 되는 모습(<돌-바람>)은 세찬 바람 속에서 땅을 일궈가는 제주 여성들의 강인함을 표현한다.
윤희수의 <참나로 존재하는 돌>. 돌의 단단한 침묵을 연필 드로잉으로 포착했다. 조기수 사진작가 제공
윤희수는 돌의 단단한 아름다움을 골똘히 응시한다. 벽면을 가득 채운 연필 드로잉 작품 <참나로 존재하는 돌>은 “표피적인 삶”을 거부하고 “침묵과 응집”으로 존재하는 돌에 대한 찬가다. 정직하고 성실한 터치로 돌이 내뿜는 ‘내공’을 그려냈다.
윤석남의 <녹색방>. 제주도의 숲과 바다를 묘사했다. 조기수 사진작가 제공
윤석남의 <녹색방>은 제주도의 원시림, 곶자왈을 수천번의 가위질로 표현했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자갈(돌)을 의미하는 ‘자왈’이 합쳐진 말로, 화산 분출 때 생겨난 거친 용암 지표에 각종 나무와 덩굴 식물이 뒤엉켜 자라는 곳이다. “파도만 빼고 모든 존재를 도형화할 수 있다”며 몇년 전부터 종이를 오려 다양한 패턴을 생산해온 그는 전시장 벽을 녹색 종이오리기 작품으로 채우고, 6만개의 푸른 구슬을 바다처럼 바닥에 풀어놓았다. 밀식한 식물들로 한낮에도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곶자왈이지만, 윤석남의 <녹색방>에선 밝고 경쾌한 무늬가 일렁인다. 미술평론가 김홍희는 “설문대할망의 창조적 파생물과도 같은 곶자왈 숲에서 기괴함과 경이가 공존하는 체험”을 읽어낸다. 4월22일까지. (064)710-7486. 제주/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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