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50여년간 매향리에 터잡고 들어섰던 미군부대 터를 가리키는 이용백 작가. 그는 관제소와 숙사 등이 있던 부대 터에 논불을 놓고 꽃씨를 뿌리는 평화 치유 프로젝트를 수년간 진행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요즘 미술판은 뒤룩뒤룩 살이 쪄버렸어요. 시장이 비대해져 몸을 못 움직이니 현실을 따라잡기도 버겁지요. 그게 지겨워서, 작업하는 방식을 통째 바꾸기로 했어요.”
아직 맵고 짠 늦겨울 바람 맞으며 작가가 내뱉는 말에는 결기가 서려 있었다. 지난달 26일 낮 아스라이 봄기운이 올라오는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언덕배기에 선 설치작가 이용백(52)씨는 숙연한 표정으로 철조망 둘러쳐진 아래쪽의 옛 미군부대 터를 바라보았다. 54년간 미군 폭격장으로 쓰였던 비운의 땅 매향리의 흉터와도 같은 곳이다. 그는 “올해 안에 이곳 옛 미군 관제기지 터에 들불을 놓아 태우고 꽃씨를 뿌려 거대한 꽃밭을 만들 참”이라고 했다. 땅을 덮은 미군 스텔스 폭격기의 거대한 그림자 모양으로 불태운 자리를 만든 뒤 그 위에 주민과 함께 꽃을 가꾸고 땅을 회복, 재생시키는 과정을 담겠다는 말이었다. 1년 이상 걸려야 실현되는 평화와 치유의 대지미술 작업이다.
매향리 스튜디오 안에 놓인 자신의 설치작업 ‘낯선 산책’ 안에서 자신의 장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용백 작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평화와 치유에 대한 갈망을 절실한 보여주기 자체로 이야기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화꽃 향기 퍼지는 동네란 이름 뜻과 달리 매향리는 1951년부터 54년간 미군 폭격장으로 쓰이면서 숱한 상처를 입었다. 폭격장은 20년 가까이 벌인 주민들의 투쟁 끝에 2005년 폐쇄됐지만, 마을 앞바다 농섬은 3분의 1 이상이 폭격으로 사라졌고, 마을 언덕 길 곳곳에는 지금도 크고 작은 포탄, 폭탄이 수북이 쌓인 풍경을 볼 수 있다. 80년대 홍대 전위작가 모임 ‘황금사과’의 주역이자 201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미술판에 알려진 이 작가가 이곳을 찾은 건 지난해 연말. 옛 매향리 교회를 리모델링한 스튜디오를 운영해온 후배 이기일 작가가 “형이 작업하기에 정말 좋은 공간이 있다”고 귀띔해주면서부터다.
“과거 폭격의 상처를 뒤로하고 새롭게 평화공원으로 거듭나려 하는 매향리의 아름다운 들녘과 바다, 그리고 흉물스러운 미군기지 터를 보면서 치유의 들불 태우기 작업을 떠올렸어요. 독일 유학 시절 거장 요제프 보이스의 관객 없는 사회적 미술 작업을 보며 눈여겨 뒀던 ‘보여주기’ 개념을 생각했지요. 현실의 메시지를 오롯이 현장에서 소통하며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과정 중심 작업이지요. 10여년 전부터 변산반도의 폭격연습장을 소재로 한 폭탄섬 설치물이나 비무장지대 아트프로젝트를 하면서 분단과 전쟁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적지를 찾은 것 같아요.”
이용백 작가의 전시 ‘한국적 모자이크’가 열리고 있는 매향리 스튜디오(옛 매향리 교회)의 정면. 이 건물을 찍은 디지털사진들의 세부 픽셀(망점)을 확대하면서 흐릿해진 모자이크 조각들을 스튜디오 정면에 다시 붙였다. 매향리의 숱한 풍상을 간직한 이 건물의 시간성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우리만의 치유방법’이라고 가칭을 붙인 프로젝트는 지난 1월 시작해 4월까지 매향리 옛 교회 스튜디오에서 선보일 전시 ‘한국적 모자이크’로 이미 첫발을 뗐다. 작가는 옛 교회를 찍은 디지털사진들의 세부 픽셀(망점)을 확대하면서 흐릿해진 모자이크 조각들을 스튜디오 정면에 다시 붙이는 방식으로 풍상을 안은 교회 건물의 역사성을 재성찰한다. 300여㎞의 비무장 지대 영역을 통째로 들어낸 조형물로 만들면서 분단과 전쟁을 예술가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구작 <낯선 산책>도 나왔다. 드론으로 매향리의 농토를 공중에서 찍고 여기에 거대한 스텔스기의 그림자를 합성한 사진 작업들은 앞으로 들불 프로젝트에서도 중요한 작업 모티브로 쓰이게 된다. 버려진 포탄들을 여러 작가들에게 작업재료로 빌려주며 협업해온 매향리 평화마을 추진위원회의 도움도 큰 힘이 되고 있다고 한다. “휙휙 바뀌는 현실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실시간 예술을 하고 싶다”는 이 작가의 새로운 꿈이 과연 올해 안에 통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화성 매향리/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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