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에 들어온 것인가?
어둠 속에서 침침한 색조로 뒤덮인 가축의 살점들이 희미하게 빛나며 전시장 벽을 채웠다. 사지가 잘리고 내장과 근육을 드러내고, 곳곳에 칼집을 넣은 소, 돼지, 닭의 몸통 그림들이다. 당장 비릿한 살코기 내음이 물컹 풍길 듯한데, 가까이서 살펴보니 몸통 상당수는 인간의 것이 아닌가. 젖꼭지가 툭 돋아난 인간의 가슴팍, 뱃살과 허벅지, 팔죽지가 비치는 순간 관객은 당혹스러워진다.
최근 서울 관훈동 나무화랑에 14년 만에 개인전을 차린 김재홍 작가의 신작들은 도살되어 내걸린 가축의 고깃점과 인간의 육체가 한데 녹아든 충격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8호 정도 크기의 그림에 해체된 고기 각 부위를 그려 108개를 한데 붙여놓은 대작 <살>과 <벌거벗은> <동행> 등으로 이름 붙여진 고깃덩어리 연작들은 당장 죽음, 도살과 얽힌 인간의 잔혹한 욕망을 연상시킨다. 작가가 작업노트에 밝힌 것처럼 “더 많이 먹고 저장하고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들의 살육을 합리화하는 진짜 인간적 야만과 폭력이 시작되는” 한 지점을 그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구화하고 대상화하는 가축들의 몸에 인간의 몸이 착시처럼 눌어붙은 건 폭력적인 위계와 구분이 비단 인간-짐승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조 속에서도 당연하듯 펼쳐지는 현실을 상징한다. 도살된 가축의 고기는 섕 수틴이나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표현주의 작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재다. 하지만 김 작가의 신작은 실존, 죽음의 형이상학적 문제보다 인간도 가축처럼 권력과 이윤 욕망의 도구로 철저히 전락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고발로 다가온다. 작가는 1990년~2000년대 초 한반도의 산하와 인간의 몸이 녹아드는 듯한 ‘착시의 역사화’를 그리며 진보 진영의 주요 리얼리즘 작가로 활약했다. 2004년 개인전 뒤 그림책 삽화에 한동안 전념하다 돌아온 그의 신작들은 요즘 인사동 미술인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13일까지. (02)722-7760.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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