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 문신 작가의 1952년 작 <야전병원>(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소장). 당시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유일한 판화 작품으로 꼽힌다.
변방? 불모지? 한국 미술판은 오랫동안 왜 이 항구도시를 폄하해 왔을까.
부산 해운대에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2층 전관에서 이달 중순부터 차려진 2개의 개관 20돌 대형기획전이 던지는 물음이다. 일제강점기 부산 미술의 동향을 다룬 1부 ‘모던, 혼성: 1928-1938’전과 한국전쟁기 국내 미술 중심이었던 피란수도 부산의 미술인들을 조명한 2부 ‘피란 수도 부산: 절망 속에 핀 꽃’전은 사연 많은 과거를 간직한 부산 미술의 재발견이다. 한국 근현대미술이 정립되는 시기에 서울 못지않게 중요한 흐름을 이끌었으나, 후대에 이상하리만큼 무심히 지나쳤던 부산 미술의 풍성한 유산을 처음 재조명하는 기획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일제강점기 부산 근대화단의 선구자로 꼽히는 일본 작가 안도 요시시게가 1926년 그린 수채드로잉 연작들 중 한점. 조선의 시장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 등을 꼼꼼히 관찰해 현장감 넘치게 그렸다.
전시장 2층에 올라가면 왼편 벽에 1, 2부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각각의 입구가 큰 구멍처럼 잇따라 보인다. 20~40년대와 50년대 부산 미술의 현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타임슬립’의 통로다. 1부는 한반도의 첫 관문이란 지정학적 조건 덕분에 20세기 초부터 다수 일본 미술가들이 들어와 거쳐가거나 정착하며 양화, 일본화 화풍들을 전파했던 초창기 부산 화단의 양상을 새로 모은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 사진 등을 통해 보여준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란 온 작가들의 생계 터전이 됐던 영도 대한도기에서 만든 도자기 대접. 한국화 거장 소정 변관식의 <진양풍경>이 바탕 그림으로 들어갔다.
부산은 조선에 풍경기행을 오는 일본 화가들이 가장 먼저 들어와 사생을 시작하는 장소였다. 이런 역사공간적 특성을 감안해, 기획진은 20~30년대 부산을 거쳐 들어간 일본 화가들의 풍속 사생 화첩 등을 발굴해 전시장 전면에 우선 눈에 띄게 배치했다. 20년대 후반에는 안도 요시시게(1888~1967) 등의 일본 화가들이 정착하고, 이들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임응구, 우신출 등이 화단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이런 변화도 이어지는 한일 작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실감하도록 해놓았다. 부산과 일본을 오가다 27~35년 부산에 자리잡고 작업하면서 현지 근대화단의 기틀을 세운 안도의 조선 풍속 드로잉 40점과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한 임응구, 그로부터 배운 우신출, 독자적인 화단 활동을 펼친 정상복, 김종식의 정물·풍경화들이 이런 흐름을 증거한다.
안도의 드로잉들은 조선 시장과 남녀군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의 노력이 엿보이지만, 조선 사람들을 타자화해서 보는 듯한 시각이 선뜻선뜻 드러나 있다. 압축적 묘사력이 엿보이는 임응구의 <나부> <정물>과 분방한 표현주의 붓터치를 지닌 정상복의 인물화 등도 눈을 끄는 작품들이다. 전시에서 돋보이는 또다른 성과는 39년 결성돼 40~42년 3차례 동인전을 꾸린 부산 최초의 양화 동인 ‘춘광회’의 활동상을 처음으로 정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춘광회 활동규약문과 40년대초 부산 최고의 건축물로 유명했던 미나카이백화점에서 열렸던 전람회 홍보물, 동래고보시절 일본인 미술교사의 지도를 받은 화가 김원갑의 그림일기 등이 나와 당시 부산 화가들의 ‘모던’ 감각을 엿보게 하고 있다.
2부 ‘피란 수도…’전은 한국전쟁기 부산에 피란 와서 활동했던 대가들과 부산화단 작가들의 그 시기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피란민 보금자리를 밝은 색감의 반추상구도로 담은 김환기의 <판자촌>, 서로 손들이 묶인 기묘한 모습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이중섭의 은지화, 박수근의 <모자>, 유일한 전쟁판화로 꼽히는 문신의 <야전병원> 같은 대가들 작품 외에 양달식, 김종식, 서성찬 등 부산 작가들의 소박하면서도 색채감이 강렬한 인물, 풍경화들을 같이 볼 수 있다. 특히 ‘1회 현대작가초대전’, ‘토벽동인전’, ‘신사실파전’, ‘후반기전’ 등 부산 광복동 일대 다방에서 숱하게 열렸던 주요 동인·단체 전시들을 각각의 영역으로 나눠 당시 소개자료와 출품작가별 작품 등으로 재구성한 시도가 눈길을 끈다. 1부 전시의 연결 통로와 잇닿은 안쪽 전시장에 임호, 양달석, 우신출 등 종군화가들의 전장화들을 처음 한자리에 모아놓고, 아이젠하워·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을 그린 조덕환의 전쟁기록화까지 내보인 것은 감상의 숨은 묘미다.
근대기 부산 화단의 선구자로 꼽히는 임응구의 1928년작 <나부>.
당시 피란 화가들의 생계 기반이 된 ‘대한도기’ 회사의 그림 그려진 도자기 제품들이 상당수 진열된 것도 2부 전시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한국화 거장이던 소정 변관식이 당시 깔깔한 필치로 그린 산수화 바탕 그림이 들어간 대접 등이 관객 앞에 나와 색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당시 미술계 사건들을 다룬 <국제신보> 등의 기사 목록과 김환기와 그의 부인 김향안 등이 덕담글을 쓴 1952년 백영수 전시회 방명록 등의 사료들도 풍성하게 공개돼 피란 수도에서 몸부림치며 창작 열망을 발산했던 작가들의 내면을 여러모로 느끼게 해준다.
일제강점기 ‘삭성회’, ‘향토회’ 등의 동인단체를 결성하며 활발히 움직였던 평양, 대구 화단에 비해 부산 화단은 후대 미술사 연구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다. 이런 허물을 벗고 재조명의 계기를 마련한 전시의 의미는 작지 않다. 단, 여섯달여에 그친 준비 기간에 골격을 급조하다 보니, 세부 얼개는 허점들이 수두룩하다. 50년대 전시 요람이던 부산 광복동, 남포동 일대 다방 공간은 50년대 지도사진과 작가, 전문가들의 영상증언 정도로만 허술하게 처리하고, 50년대 전시 방명록 풀이글도 군데군데 해석이 빠지거나 잘못 표기된 부분이 보인다. 예산 문제로 가벽이나 진열장을 확보하지 못해 벽면 외에 휑한 공간이 숱하게 노출되는 것도 보기 민망하다. 7월29일까지. (051)740-4241. 부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부산시립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