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산>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순종 작가. 유대인 대학살 이미지가 전사된 화폭에 촘촘하게 침을 꽂아 산 모양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작가는 “찔러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몸의 혈을 뚫어 치유를 해주기도 하는 침의 이중적인 양면성을 통해 죽음과 생명이 연결되는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몸을 콕콕 찌르는 침(針)들이 부드러운 털이 되고 풀이 된다. 가까이에서는 금속성 광채가 번득이는 한방침 수천개가 무수히 박힌 화폭들이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털이 수북이 자란 ‘심장’으로, 유연한 여체의 누드화로, 이 땅의 산과 계곡을 그린 풍경화로 탈바꿈한다.
육순을 넘은 나이에도 화단에서 여전히 팔팔한 ‘언니 작가’로 통하는 이순종(65)씨가 침에 꽂혔다. 그가 최근 내놓은 신작들은 한방침술로 세상과 몸의 원리를 풀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 연금술을 보여준다. 지난 10여년간 한방병원에서 침 치료를 받으며 얻은 깨달음을 설치 작업과 드로잉으로 펼쳐낸 ‘침술의 미술’이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전시공간 씨알콜렉티브에 펼쳐놓은 개인전 ‘백만대군’의 현장이다.
제목인 백만대군은 세상과 우리 몸 곳곳의 막힘 현상, 즉 긴장과 갈등, 병고 등과 맞서 싸우는 작가 혹은 우리의 선한 의지, 그리고 의지를 표상하는 막대한 분량의 침들을 뜻한다. 침은 사전적인 정의로 보면, 몸을 째고 파들어가는 쇠붙이다. 당장 아프고 꺼림칙하지만, 찌름으로써 몸의 막힌 부분(혈)을 뚫고 기의 흐름을 틔워준다. 작가는 한방병원에서 모은 약침 60만개를 이어붙여 <카니발> <산> <전리품> 등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침바늘들이 유대인의 대학살을 담은 홀로코스트 이미지가 전사된 화폭을 쿡쿡 찌르면서 필선처럼 후덕한 산자락을 빚어냈다. 머드팩 축제에 몰린 사람들의 몸짓을 담은 사진 이미지 위에도 침들이 촘촘히 박혀서 거대한 강물 같은 혈류가 된다. 붓 대신 약침들을 쿡쿡 화폭에 꽂으며 몸과 자연의 에너지가 넘치는 세상을 표현하니, 침술과 미술이 경계를 넘어 오고 가는 형국임을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작가는 “아프게 찔러 상처를 내면서도, 동시에 몸이 막힌 곳을 뚫어주는 침의 양면성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이순종 작가의 전시장 모습. 사슴뿔과 침더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얽힌 설치 작품 <전리품> 연작이 보인다. 씨알콜렉티브 제공
“10여년 전부터 다석 유영모, 씨알 함석헌의 생명사상에 몰두하면서 몸의 에로틱한 생명 에너지와 흐름에 주목하게 됐어요. 온 세상이 사람의 몸과 같아서, 여기저기 닫히고 소통이 안 되어 긴장이 일어나고 전쟁과 갈등이 생긴다고 봐요. 그걸 이미지로 풀어 치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병원에서 맞은 침들이 백만대군처럼 그런 생각들을 작품에 풀어내는 단서를 만들어줬어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주목받았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초현실주의적인 감각으로 분방하게 재해석해 그리거나 철제 구조물 아래 물신화한 광고 이미지나 관능적인 바비인형들을 놓는 설치 작업들을 내놓으면서 생동하는 감각으로 시대와 세상을 색다르게 조망하는 시도를 선보여왔다.
그 뒤 한동안 작업을 끊고, 다석과 씨알의 생명사상 연구에 몰두한 뒤 나온 신작들은 죽음으로써 생명이 터진다는 씨알의 가르침을 침의 물성으로 드러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사유는 현재 미술판의 정체성에 대한 나름의 비판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전시장 한켠에 사슴뿔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복제상, 침더미 등을 얽어 모아 꾸린 <전리품> 연작이 그런 사례다. 옆에 놓인 사슴뿔에 찔리는 듯한 구도로 배치된데다, 자개판을 덕지덕지 붙인 채 처박힌 듯한 몰골을 한 <생각하는 사람>의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는 이미 힘을 잃은 서구 모더니즘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 한국 미술판의 비주체성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이달 21일까지. (02)333-0022.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씨알콜렉티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