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로 1번지>는 국민의 거주권을 강조하는 취지로 청와대 경내에 도시 난민들의 임시 거처를 두는 안을 제시했다.
마침 촛불이 타오르기 직전이었다. 2016년 가을 박성태(정림건축문화재단 상임이사), 최춘웅(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김세훈(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 2018년도 정림학생건축상 심사위원으로서 공모 주제를 정하는 자리였다. 재난건축, 대학주거공간 등 사회·정치적 이슈를 공모전 주제로 삼아온 정림학생건축상은 건축가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건축대전과 함께 젊은 건축학도들의 양대 등용문으로 꼽힌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최순실 등 핵심 측근 외엔 좀체 ‘사람’과 대면하지 않았던 대통령이 사는 곳, 청와대는 대통령이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시크릿 가든’에 불과할 뿐 일반 국민들에겐 대표적인 불통의 상징 공간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은 예비 건축가들에게 ‘우리 동네 청와대’를 설계하라는 과제를 내주자고 결의했다. 최춘웅 교수는 “청와대에 대한 지식·경험이 없는 학생들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에게 익숙한 마을 일부가 되는 청와대의 모습을 기획하고 새로운 정치가 담고자 하는 시대정신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광화문 전역에 나지막한 처마들로 구성된 청와대의 모습을 제안한 <무궁>.
‘우리 동네 청와대’ 청사진을 제출한 팀은 모두 139개. 심사위원들은 이 중 열두 팀(대상 5팀, 입선 7팀)을 골라 지난달 24일 시상식을 했다. 수상작 12개를 살펴보면, 건축학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정치 세계가 담겨 있다. 현재 청와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이웃 살림집 사이에 녹아들도록 하자는 ‘온건한’ 안도 있지만, ‘저런 곳에 지으면 대통령 경호를 어떻게 하나’ 하는 물음표가 자연스레 달릴 정도로 튀는 아이디어들도 섞여 있다. 대상에 오른 <퍼지는 마을: 경계 흐리기>는 대통령의 집무실·관저·비서동 간의 거리를 좁혀 불필요한 동선을 최소화하고 접근성을 최대한 높이는 방식이다. 청와대에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와 경호 기능만 남기고 도시의 경계를 허물겠다는 것이다. <청와대로 1번지>는 현재 청와대 터를 그대로 유지하지만 경제적 사정으로 집밖에 나앉게 된 이들을 위해 청와대 경내에 컨테이너 같은 모듈화된 임시 거처를 만든다는 다소 과격한 방안이다. ‘주거권은 중요한 문제지만 왜 그 해법을 반드시 청와대 터에서 찾아야 하느냐’는 비판도 있었으나,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로 1번지’라는 주소를 도시 난민들과 공유한다는 발상은 파격적인 상징성이 있다”(최춘웅)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양화대교 하부에 청와대 업무공간과 시민들의 공원을 배치한 <어디냐고 여쭤보면 청와대교>.
한강을 가로지르는 양화대교 하부에 청와대 업무공간과 시민들의 공원을 배치한 <어디냐고 여쭤보면 청와대교>.
청와대 경호실엔 충격적인 발상이겠지만, 한강 다리 아래 청와대 시설을 넣는 <어디냐고 여쭤보면 청와대교>도 대상에 뽑혔다. 솔직한 방법으로 구조체의 긴장을 드러내는 건축물인 다리는 늘 건축학도들에게 인기있는 소재다. 최근 건축계에선 다리를 활용한 건축 프로젝트들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영국 디자이너인 토머스 헤더윅이 계획한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런던 가든 브리지 파크’, 워싱턴디시 애너코스티아강에 놓인 다리를 공원화하는 렘 콜하스의 ‘11번가 브리지 파크’는 기존 도시의 구조물에 활력을 불어넣는 최근의 공공 디자인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청와대교’는 선유도공원과 가깝고 인근에 국회의사당이 있는 양화대교 하부를 이용하는데, 교각과 교각 사이에 세로 5m, 가로 10m의 구조물을 삽입하고 청와대 업무 공간과 시민들의 쉼터를 가까이 배치하는 것이다. 김영민 교수는 “홍수·경호 등의 문제가 제기되지만, 가변적 구조물로 유연한 공간을 만드는 건축언어의 민주성이 담겨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입선작인 <청와대 1호점>은 지방분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을 설계한 학생들은 대구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2016년 12월 대구 서문시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의 경험이 모티브가 됐다. 상인들을 위로하러 온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잠깐 얼굴만 비치고 곧 청와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지방에 사는 서러움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 창덕궁 옆에 3~4개의 모듈화된 건물을 들여 청와대 1호점을 만들고 마치 편의점처럼 나라 곳곳에 청와대 분점을 늘려가자고 제안했다. 대통령이 방문하지 않을 때는 토론장·문화시설 등으로 활용해 국민들이 일상의 정치를 체험하도록 했다.
박성태 상임이사는 “출품작들을 살펴보면 높은 학비, 취업난 등으로 허리가 휘는 요즘 젊은이들은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치적 발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춘웅 교수는 “당선작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겸손과 평등이 전제된 소박한 청와대에 대한 기대”라며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대통령과 국민들이 지극히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청년들의 꿈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정림건축문화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