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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900년 된 녹슨 그릇이 품었던 ‘남경천도’의 꿈

등록 2018-04-10 05:00수정 2018-04-10 09:42

영국사·도봉서원 유물 특별전

고려 숙종의 천도 기원 담은
‘계림공’ 이름 새긴 밥그릇
밀교 의식용 금강령 비롯

10세기 천자문 석각본 파편
18세기 겸재 정선의 작품 등
서울 불교·유교사상 중심인
도봉산 천년유산 한자리에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영국사와 도봉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유물로 주목받는 고려시대 전기의  밀교의식 용구들. 금강령(맨왼쪽)과 물고기 모양의 탁설(맨앞), 금강저. 특히 금강령은 천왕상과 명왕상 등 무려 11개의 신상들을 5개면에 조화롭게 배치한 금속공예 명품이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영국사와 도봉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유물로 주목받는 고려시대 전기의 밀교의식 용구들. 금강령(맨왼쪽)과 물고기 모양의 탁설(맨앞), 금강저. 특히 금강령은 천왕상과 명왕상 등 무려 11개의 신상들을 5개면에 조화롭게 배치한 금속공예 명품이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900여년 묵은 밥그릇에 깃든 고려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온통 녹이 슨 겉표면에 무언가 글씨 획이 새겨진 11세기 고려시대 굽다리그릇 한 사발이 역사적 상상을 부추킨다. 지난달부터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영국사와 도봉서원’을 열고있는 서울 방이동 한성백제박물관이 내보인 이 유물은 당대의 밥이나 국을 담던 그릇 혹은 불교 공양그릇으로 추정되는데, 학계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그릇 주둥아리 입 대는 부분(구연부) 밑에 힘찬 글씨체로 새긴 ‘계림공(鷄林公)’이란 권력자의 이름 때문이다.

고려 15대 임금 숙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썼던 호칭인 `계림공‘ 글자가 새겨진 굽다리 그릇. 입을 대는 부분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추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고려 15대 임금 숙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썼던 호칭인 `계림공‘ 글자가 새겨진 굽다리 그릇. 입을 대는 부분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추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계림공은 고려 15대 임금 숙종(재위 1095~1105)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이다. 그는 역사학계에서 고려판 ‘수양대군’으로 입에 오르내린다. 15세기말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제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등극한 것처럼, 고려 11대 문종의 셋째 아들이던 계림공 또한 병약했던 11살짜리 조카(14대 헌종)를 내쫓고 임금이 된다. 동북 지방의 여진족 토벌을 위해 기병, 보병, 승려군으로 꾸린 정벌군 ‘별무반’을 윤관 장군을 시켜 조직하고 해동통보, 은병 등의 화폐를 발행한 것이 주된 치적인데,개경에서 남경(서울)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궁궐을 짓고 천도계획을 세운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국사터에서 출토된 금강령 두번째 면을 가까이서 본 모습. 군다리명왕과 범천, 제석천이 한 화면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영국사터에서 출토된 금강령 두번째 면을 가까이서 본 모습. 군다리명왕과 범천, 제석천이 한 화면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푸른 녹이 빛을 발해 신비감마저 감도는 ‘계림공의 밥그릇’은 이름이 새겨진 것외에 모양이 비슷한 것까지 모두 17점이 나와있다. 이 유물들을 학계가 주목하는 건 서울 도읍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숙종이 천도를 갈망했던 남경(서울)의 절터에 그가 시주한 것이 확실한 유물이 처음 확인되어서다. 실제로 그릇 위쪽 계림공의 이름새김 바로 뒤에는 ‘施’(베풀 시)자를 새겨 그가 시주한 예물임을 보여준다. 유물은 나온 과정은 극적이다. 2012년 서울 도봉산 기슭의 조선시대 대형 서원인 도봉서원의 복원사업을 위해 서원건물터를 발굴하다가 나왔다. 서원터에서 훨씬 이른 시대의 고려시대 거찰 영국사터가 일부 드러났고, 발굴 끝물에 절의 금당터로 추정되는 유적 지하에서 고려 불교공예품들이 가득 담긴 청동솥과 청동동이가 기적적으로 발견됐다. ‘계림공의 밥그릇’ 유물 17점은 그 안에 금강령, 금강저, 향완 등의 다른 고급유물들과 같이 섞여서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사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정황상 숙종은 일찍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도봉산 기슭의 영국사를 상당기간 출입했고, 이 절과 끈끈한 인연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은 당시 개경에서 서울 남경으로 천도를 처음 구상하고 청와대 부근에 궁궐까지 지은 대표적인 남경 천도파였다. <고려사>를 보면 숙종이 즉위 4년인 1099년에 남경 삼각산에 행차해 도읍터를 돌아보고 재를 행한 이래로 숙종 9년인 1104년 궁궐을 완성하고 이후 여러차례 순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도봉산 자락 영국사에 이 밥그릇을 시주한 건 서울에 대한 그의 애착과 인연을 보여주는 증표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애초 이 유물을 실견하고 명문 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린 금속공예사가 주경미 박사는 전시 도록에 실은 논고를 통해 “숙종은 즉위 이전부터 영국사에 상당한 분량의 금속그릇을 희사한 것이 분명해진만큼 즉위 뒤에도 남경으로 천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국사를 방문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고 밝혀놓았다. 고대 백제와 통일신라 권력자들도 자신들이 쓰던 물건을 절에 바치는 사례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계림공의 밥그릇들은 그가 평소 입을 대며 먹었던 식기였을 가능성도 있다.

전시에서 숙종의 행적과 관련해 흥미를 모으는 유물은 또 있다. 이 전시 최고의 명품 유물로 꼽히는 불교 밀교의 의식용 도구인 금강령과 금강저, 그리고 금강령 안에 들어있던 딸랑이 방울 격인 물고기 모양의 탁설이 그것이다. 밀교는 신비주의적인 주문과 의식을 행하는 주술적 불교로, 전시된 세개의 기물은 전형적인 밀교 의례에 쓰이는 한갖춤(세트)이다. 특히 천왕상과 명왕상 등 무려 11개의 복잡한 신상들을 5개면에 조화롭게 배치해 새겨넣은 금강령(왼쪽)은 중국, 일본에서도 비슷한 도상을 볼 수 없는 최고의 금속공예품으로 선대 백제 장인이 만든 금동대향로의 조형미를 보는 듯한 감동을 자아낸다. 금강령 안에 들어있던 탁설도 다른 작품들은 대개 방울막대 모양인데 비해, 영국사터 출토품은 여의주를 문 물고기 모양으로 정성껏 빚어냈다는 점에서 완성도가 남다르다. 이렇게 빼어난 고급의 의례도구들은 당연히 제왕이 참석하는 불교의례에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고려사>에는 숙종이 재위중 인왕도량과 불정도량 등 밀교의례로 추정되는 다양한 의식을 행했다고 기록돼 있어 전시장의 금강령,금강저 또한 숙종의 호국, 남경천도에 대한 발원과 숨결이 묻어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돌에 새긴 천자문과 경전들도 전시장에 나왔다. 특히 천자문 석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자문 관련 유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돌에 새긴 천자문과 경전들도 전시장에 나왔다. 특히 천자문 석각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자문 관련 유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있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불교사나 서예사적으로도 이 전시의 가치는 크고 넓다. 지난해 절터 발굴중 확인된 ‘도봉산영국사혜거국사비’의 비석 파편 탁본이 내걸렸는데, 불교사의 권위자인 최연식 동국대 교수는 비편을 분석해 10세기 초중반 혜거국사가 중국 유학을 다녀와 영국사를 국찰로 부흥시킨 법안종파의 큰 스님이며 그가 고려초 나라 안 아홉개 불교 선종 종파인 구산선문의 일부인 사자산 산문의 4대조란 사실을 고증해 영국사가 사자산산문의 소속이란 점을 도록 논고로 밝히는 성과도 거두었다. <한겨레>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10세기 돌에 새긴 천자문 석각 파편은 고려 유일의 불경 새김돌인 석경과 함께 나왔다. 대여섯 글자에 불과한데도, 칼날처럼 엄정하게 획을 긋고 당당한 기운이 뻗치는 구양순 서체풍 글씨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건국초 고려의 강직했던 국가적 기운을 단번에 실감시켜주고 있다. 이 천자문 석각은 전시를 위한 분석과정에서 글자 일부가 10세기 고려 성종의 이름자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획을 뺀 피휘의 흔적도 확인된다. 10세기 후반까지 연대가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판명돼 현재 중국 최고의 천자문석각(11세기)보다 더 연대가 이른 세계 최고의 천자문 석각본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

고려초 서울 지역의 문화사를 처음 구체적으로 일반인에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고려 특유의 청동소탑 명품과 거대한 광배조각, 효령대군이 시주했다는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18세기 겸재 정선과 심사정이 도봉서원을 그린 후대의 명품그림까지 줄줄이 내보인 이 대작 전시는 올 상반기 반드시 봐야할 문화유산 기획전으로 첫손 꼽을 만하다. 남경천도의 비화를 비롯해서 천여년간 서울의 불교, 유교 사상의 중심지였던 도봉산 자락의 숨은 역사 이야기들이 구구절절 펼쳐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6월3일까지. (02)2152-5800.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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