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공식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의 모습. 건축물의 사방 외벽을 지역의 자생식물들로 뒤덮어 미술관이 마치 풀꽃정원을 두른 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프랑스 작가 패트릭 불랑이 디자인한 환경예술작품으로, <수직정원>이란 제목이 붙었다.
석양녘 미술관을 나오니 풍광이 압권이다. 남쪽 멀리 푸르죽죽한 하늘과 바다가 수평선을 이루며 맞닿아있다. 북쪽으론 겹치고 겹친 태백산맥 끝자락 산봉우리들이 육박해오고, 그 아래로부터 금실처럼 낙동강이 흘러온다. 서쪽으론 녹산벌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주위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철새의 낙원’이라는 부산 을숙도 공원에 지난달 16일 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은 주변 대자연의 장엄한 경관에 맞춰, 알록달록한 초록빛 건축물이 되었다. 지상 4층, 연면적 4600여평의 미술관 사방 콘크리트 외벽에는 풀꽃 170여종이 싹을 틔우고 자란다. 을숙도 자연의 미감을 미술관에 반영하고 싶다는 김성연 관장의 생각이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환경예술가인 패트릭 블랑, 동아대 조경학과 교수진·학생들의 노력과 만나 <수직정원>이란 영구설치 작품으로 태어났다.
미술관은 지난해 완공 당시 대형 건설사가 물류창고처럼 뚝딱 지은 탓에 숱한 구설에 올랐다. 부산에서 대안공간을 운영한 지역 기획자 출신으로는 처음 공공미술관 수장이 된 김성연 관장과 학예사들은 새 건물인데도 당장 공간을 리모델링해야하는 난제 앞에서 속앓이를 했다. 우선 삭막한 건물 외형은 블랑의 정원 개념으로 기발하게 풀었다. 블랑은 해운대를 마주보는 이기대 절벽에서 추운 겨울날 피어난 보랏빛 해국꽃의 모습에서 부산 사람의 강인성을 느꼈고, 이를 개관전 작업의 ‘뮤즈(예술적 영감을 주는 연인)’로 삼게됐다고 털어놓았다.
현관 안쪽에 설치된 독일작가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공간 설치작품인 <토비아스 스페이스>. 좁은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직접 조형물 안에 들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둥과 보가 너무 많고, 고르지 않은 바닥을 지닌 미술관 내부의 열악한 공간조건은 또 어떻게 다듬어낼 것인가. 기획진은 현대미술의 획일화한 백색공간이나 기업의 몰인정한 자본공간을 대체하고 인간과 자연의 입김이 서린 영상과 설치작업을 구상했다.
1층 ‘아티스트 프로젝트’ 섹션의 전준호 작가는 <꽃밭명도>라는 설치영상작업에서 ‘장소특정적’ 해석의 진수를 보여준다. 바닥 뚫고 자란 잡초를 작품에 포함시키고 구석의 작품 통관용 셔터문에는 붉은 아크릴 판을 붙여 바깥 풍경이 기묘하게 비치게 만들었다. 제 구실을 잃고 뉘어진 채 여닫히는 문과 조명이 바닥에 거꾸로 비치는 창문 섀시 등의 일상사물들은 제 구실 못하는 디지털 기계문명의 부조리함을 은유한다. 과거와 미래, 현재의 시간성이 뒤섞여 나타나는 영상설치물의 이미지 소품들은 섬뜩하면서도 기발해 보인다.
전준호 작가의 설치작품 ‘꽃밭명도’의 일부분. 바닥의 틈새를 비집고 자란 잡초를 전시 개념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전망과 모색을 살펴본 지하의 ‘미래를 걷는 사람들’ 섹션에는 휴머니즘의 본질을 묻는 수작들이 눈에 띄었다. 물 속에서 호흡기를 달지 않고 수레를 끌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 숨쉬는 베트남계 일본작가 즌 응우엔 하츠시바의 퍼포먼스 영상 <베트남 기념 프로젝트>는 인간이 맨몸으로 생존을 지속할 수 없는 바닷속에서 휴머니즘의 본질과 힘에 대한 근원적 사색을 이끈다. 부부 아티스트 뮌의 <바리케이트 기념물>은 시위현장의 바리케이트를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간적 구조물로 재해석한다. 고적대의 연주 영상과 반대편에 원형, 다선 등의 기하학적인 바리케이드 그래픽이 나타나는 이 작품은 시위대가 포진한 광장의 열정을 해부하듯 분석적으로 재구성한다. 스위스 작가 지문의 소리예술 설치작업이 펼쳐지는 2층의 ‘사운드미니멀리즘’ 섹션은 단순하지만 스펙터클한 소리와 움직임의 퍼포먼스 마당이다. 모터에 달려 움직이는 무수한 막대들이 바닥의 상자를 치거나 동전 모양의 와셔가 바닥에 부딪혀 움직이면서 빗소리, 대나무소리 같은 음향을 내는 이 소리예술 작품은 이질적인 인공과 자연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객이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를 지닌 조형물 속에 직접 들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체험 공간으로, 1층 현관 안쪽에 차려진 독일 작가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토비아스 스페이스>는 관객교감을 위한 기획진의 또다른 고심의 산물로 읽혔다.
이번 개관전은 시설과 규모만 내세웠던 기존 지역 미술관의 전시 관행과는 다른 ‘기획의 힘’을 보여준다. 주말 2만여명, 평일 평균 1500~2000명의 입장객이 몰리며 관객몰이를 하고있는 성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김 관장은 앞으로 미디어아트와 설치작품 위주로 전시를 지속하겠다고 했다. 9~11월 열리는 부산비엔날레 전용공간으로도 쓰여 미술관 자체 기획을 풀어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공간 리모델링부터 고민해야하는 전시장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미술관의 성패가 달렸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8월12일까지. (051)220-7400~01.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