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서울역 귀빈실 공간에 들어간 이부록 작가의 설치작품 <로보다방>. 개성공단에서 가동됐던 미싱테이블 공장의 일부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여기서 장래 남북 노동자들이 노동보조물자인 커피를 받아 마시며 미래를 논한다는 상상을 풀어냈다.
“개성공단 심포지엄? 이런, 빨갱이들이 만들었구나!”
“여기가 어떤 곳인데 공산당 전시를 열어?”
심포지엄은 결국 중단됐다. 지난 7일 낮 서울 봉래동 옛 서울역사 중앙홀의 개성공단 심포지엄 연단 주변은 욕설섞인 고성들로 시끌시끌했다. 대한애국당의 역전 시국집회에 참석한 태극기 부대의 노인들이 깃봉을 휘두르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전날인 6일 옛 서울역사를 개조한 문화역서울 284에서 예술가들의 기획전 ‘개성공단’이 막을 올렸고, 기념행사로 ‘개성공단과 통일문화의 미래적 가치’에 대한 연구자, 예술가들의 심포지엄이 열리던 참이었다.
경찰이 출동했고, 시위대가 난입하진 않았다. 하지만, 일부 참석자들은 질린 눈길로 입구 쪽을 흘깃흘깃 쳐다봤다. 정작 참여한 예술가들은 들뜬 표정으로 “절묘한 행위예술”이라면서 영상과 사진을 계속 찍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태극기 집회와 함께 진행된 심포지엄은 생각지도 않던 차원에서 남북대립을 실감시켜주는 퍼포먼스를 펼친 격이 되었다.
기획전 ‘개성공단’은 2016년 2월 가동중단된 개성공단의 기억을 소재로 한다. 2003년 건립된 이래로 10여년의 가동기간 벌어진 일들과 남북한 사람들의 관계 따위를 시각예술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했다. 북한미술연구자로 전시를 짠 박계리 홍대 연구교수는 “10년넘게 남북한 사람들이 일했는데 그 공단의 실체를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게 모티브가 됐다”고 말했다.
참여작가 10여명은 거의 모두 개성공단을 가보지 않은 이들이다. 공단이 2년전 문을 닫은 뒤 기획자와 함께 조사와 수집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창한 전시를 차리는 게 가능한 일일까. 1, 2층 전관을 둘러보면, 미묘하고 착잡한 결과가 나왔다고 할 만하다.
역사 2층의 옛 그릴 공간에서 상영중인 임흥순 작가의 근작 <형제봉 가는 길>. 관을 지고 묵묵히 북한산 형제봉을 오른 작가의 모습을 비춘 영상물이다. 관을 지고 산을 오르는 건 2016년 개성공단 정상화를 염원하며 벌어진 장례 퍼포먼스에서 착상한 것이라고 한다.
1층 들머리에는 개성공단에 대한 남한과 북한 로동신문 등 언론들의 보도내용 스크랩을 아카이브로 보여준다. 기둥 위에는 공단 진출기업들의 통계 현황을 적은 패널을, 중앙홀과 오른쪽 측면방은 양아치의 설치작업인 풍선에 매달린 개성공단의 입체모형도가 있다. 더 안쪽에는 풍선과 풍선 조형물에 둘러싸인 실제 차량이 불을 켠 채 서있고 다른 한켠에는 포니차 모델 위로 풍선이 매달린 모습도 나타난다. 개성공단 폐쇄 위기 당시 각종 제품들을 가득 실은 포대를 차체 곳곳에 붙이고 남쪽으로 내달리던 차량들의 모습에서 초현실적인 영감을 얻은 것으로 짐작된다.
2층에서 돋보이는 건 임흥순 작가의 신작이다. 스스로 관을 짊어지고 북한산 형제봉을 올라가 원경을 조망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물 <형제봉 가는 길>은 2016년 개성공단 정상화를 염원하며 벌어진 업체들의 장례식 관 퍼포먼스에서 착상한 것이다. 남북관계 이면에 깃든 인간들 내부의 고통에 주목했다고 임 작가는 설명했다. 더 안쪽엔 최현준 작가가 북한 남한 여성노동자들의 공단 내 대화를 재현한 영상과 공단 내 작업실의 설치 공간들이 차려졌고, 유수 작가가 휴전선 남쪽 도라전망대에서 개성공단과 개성시가의 초저녁 전경을 확대해 찍은 파노라마 원경사진들도 내걸렸다. 다른 참가작가들과 달리 개성공단을 숱하게 다녀왔다는 유수 작가의 원경사진은 이번 전시에서 공단의 지리적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일한 이미지 기록이기도 하다.
1층 왼쪽 옛 귀빈실 자리엔 이부록 작가가 개성공단에서 가동됐던 미싱테이블 공장의 일부공간을 재현한 <로보다방>을 차려놓았다. 여기서 장래 남북 노동자들이 노동보조물자인 커피를 받아 마시며 미래를 논한다는 상상을 풀어냈다. 미싱 테이블 위에 거울판 달린 커피잔을 놓은 건 나름 공단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관객의 시선도 성찰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비친다. 귀빈실과 중앙홀 사이엔 공단의 생산품 등을 원형 그림자 스크린에 돌아가면서 비치게 해놓은 이예원 작가의 파노라마식 설치작업들이 자리를 잡아 시선을 끌어들였다.
붉은 노을이 남은 봄날의 초저녁 개성공단, 개성시의 원경을 담은 파노라마 사진. 앞쪽에 휴전선의 숲과 북한군 초소가 보인다. 유수 작가가 올해 4월 휴전선 남쪽 도라전망대에서 촬영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 가운데 개성공단의 지리공간적 실체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일한 이미지 작업이다.
양아치 작가의 설치작품 <평양, 30분>. 개성공단이 폐쇄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비닐포장된 생산품을 차체 곳곳에 붙이고 내려오던 수송차량의 모습이 작업의 모티브가 됐다.
‘개성공단’전은 의미에 비해 충실한 스펙터클과 보고 읽는 재미를 주지 못한다. 작가들이 공단 활동의 기록물, 통계자료 따위와 실무자들의 간접 취재에만 주로 기대어 건조한 아카이브 작업 중심으로 쏠려있는 탓이다. 작품들 사이의 세부도 정제되지 않았고, 기획자의 의도만 앞서가는 큐레이팅의 흔적이 드러난다. 실제로 기획자나 작가들 모두 이번 전시는 “반쪽 ”이라고 잘라 말했다. ‘양아치’ 작가는 반드시 개성공단 현장에 가서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전시가 다시 후속작으로 이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북한의 정보통신망이나 북한 주민들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파악했지만, 국가보안법과 남북관계 등의 현실 앞에서 자기 검열로 사라진 작업 개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시는 분단체제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뜻밖의 사건과 공간·작업을 통해 깨닫게 해주고 있다. 9월 2일까지. (02)307-35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역서울 28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