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안 재즈 트리오 멤버들. 왼쪽부터 마크 반 룬(피아노), 로이 다커스(드럼), 프란스 반 호벤(베이스). 오디오가이 제공
“지금부터 들려드릴 곡의 제목은 ‘유 인 스마일’입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마크 반 룬이 영어로 관객들에게 말했다. 네덜란드 출신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가 지난 19일 저녁 서울 혜화동 제이시시(JCC)아트센터에서 펼친 내한공연에서다. 직전까지 이들은 ‘플라이 미 투 더 문’, ‘댄싱 퀸’ 등 익숙한 재즈 스탠더드와 팝을 연주했다. 다소 낯선 제목 탓에 관객들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순간,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였다. 관객들은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음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연주를 마친 뒤 마크 반 룬은 “멜로디를 알아 듣겠느냐?”고 물었다. 관객들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한국 가요를 연주했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양희은)는 차분한 원곡 분위기와 달리 격정적이었고, ‘보라빛 향기’(강수지)는 귀엽게 통통거렸다. ‘마음’(아이유)을 연주하는 로이 다커스의 드럼은 행진곡처럼 경쾌했고, ‘1994년 어느 늦은 밤’(장혜진)은 피아노 소나타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대체로 처음엔 원곡 멜로디를 잘 살려 연주한 뒤, 원곡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자유롭게 변주하고는 다시 원곡 멜로디로 마무리하는 식의 편곡이었다. 관객 김연진씨는 “이상은의 ‘언젠가는’이 가장 좋았다. 잘 아는 가요를 색다르게 들으니 신선하고 즐거웠다”고 말했다.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가 이날 연주한 가요들은 새 음반에 실을 곡들이다. 앞서 이들은 지난 16~17일 서울 통의동 오디오가이 스튜디오에서 ‘세월이 가면’(최호섭),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등 가요 13곡을 녹음했다. 공연 이틀 전 17일 오후 찾아간 스튜디오에선 ‘벌써 일년’(브라운아이즈) 녹음이 한창이었다. 전날부터 펼친 강행군으로 이미 13곡 녹음을 다 마쳤지만, 이 곡만은 다시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녹음실에서 나온 세 멤버는 녹음한 걸 들어보며 얘기를 나눴다. 이번에도 성에 안 찼는지 또 다시 녹음하자고 했다. 마크 반 룬은 “이 곡은 굉장히 아름답다.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몇 차례 더 녹음하고는 마지막 연주에 “오케이” 사인을 했다. 마침내 모든 녹음이 끝났다.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 멤버들이 서울 통의동 오디오가이 스튜디오에서 ‘세월이 가면’ ‘사랑하기 때문에’ 등 한국 가요를 재즈로 재해석하는 음반을 녹음하고 있다. 오디오가이 제공
이들이 가요를 녹음한 게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5월 ‘가을이 오면’(이문세), ‘서른 즈음에’(김광석) 등 11곡을 녹음해 10월 <서촌>이란 제목의 음반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엘피(LP) 500장, 초고음질시디(UHQCD) 1000장 한정으로 발매했는데, 모두 동이 났다. 엘피는 불과 45일 만에 매진돼, 지난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엘피 9위에 올랐다. 음반 발매사 오디오가이의 최정훈 대표는 “외국에서 연락을 해와 판매한 적도 있다. 외국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스포티파이에서도 200만회나 재생됐다”고 전했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또 다른 음반 기획에 들어갔다. 김인혁 프로듀서가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의 요구대로 “멜로디가 선명하고 서정적인 가요”를 엄선해 보내주면, 그들이 미리 편곡 작업을 했다. 프란스 반 호벤(베이스)은 “우리만의 색깔을 더하되 듣는 이들이 원곡을 떠올릴 수 있도록 우리 개성과 원곡 멜로디 간 균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고 편곡 방향을 설명했다. 마크 반 룬은 “재즈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을 재즈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곡을 자주 연주한다. 클래식이든 팝이든 한국 가요든 멜로디가 좋은 곡들은 다 통하는 지점이 있어 재즈로 연주하는 데 있어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각자 가장 좋아하는 곡을 물었다. 마크 반 룬은 ‘비처럼 음악처럼’(김현식)과 ‘사랑했지만’(김광석)을 꼽았다. “김광석이 노래하는 영상을 봤는데, 마치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프란스 반 호벤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꼽았다. “기존에 알던 한국 노래와 달랐다. 듣자마자 재즈 버전이 저절로 떠올랐다.” 로이 다커스는 ‘마음’을 꼽았다. “녹음할 때 드럼 연주가 흥겨워서 좋았다.”
이번에 녹음한 결과물은 후반작업을 거쳐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엘피와 고음질시디(SACD)로 발매할 예정이다. 당장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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