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30) 금지곡의 전성시대 ‘1975년의 서글픈 블랙코미디’
벌써 하얗게 잊혀진 듯하지만, 대중문화와 예술에 대한 검열의 시대가 있었다. 사실상 검열장치였던 사전심의제가 철폐된 지 만 1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리 오래된 과거도 아니다. 사전심의제는 아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거나 설사 나오더라도 사지가 잘려나가고 뒤틀린 작품들을 무수히 양산했다. 지금도 황학동이나 고물상 또는 인터넷 중고음반 쇼핑몰을 뒤져보면 금지곡으로 누더기가 된 음반, 아예 음반 자체가 금지되어 고가의 희귀작이 된 음반, 불법 복제 음반인 이른바 ‘빽판’ 등을 통해 그 시대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뭐니뭐니 해도 그 꽃(‘꺾인 꽃’)은 금지곡이었다. ‘고수들’이라면 해방 후 최초의 금지곡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겠지만, 여기서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방송윤리위원회에서 총대를 메고 금지곡 낙인을 본격적으로 찍어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절정은 1975년에 일어났다. ‘대체 어땠기에’라고 묻는다면, 대통령이 숨질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는 법을 만들고(1972년 10월 유신) 이에 대한 여하한의 반대나 개정 주장을 하는 자는 영장 없이 구속해 군법회의에서 처단(!)하는 조치(1974-75년 긴급조치)를 취하던 ‘황당무계하지만 살벌한’ 시대였다는 당시의 사회적 공기를 전하는 수밖에 없다.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자도 처단 사례였다는 점을 부연한다. 경거망동은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함 또는 그런 행동’이란 뜻이다. 세상에!
그러니 당시 위정자의 관점에서 문화적인 경솔한 행동 역시 좌시할 수 없는 중대 범죄가 아닐 수 없었다. ‘친절한 문화공보부 씨’께서는 1975년 6월 7일 ‘공연물 및 가요정화 대책’을 발표하여 각론을 세웠고, 이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에서 ‘모든 노래를 제작 당시의 상황이 아닌 현재의 눈으로 평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 그 해가 끝나갈 무렵, 금지곡으로 판정 받은 곡은 국내 가요만 223곡, 외국 가요는 260여 곡에 달했다.
양적인 측면 뿐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1975년의 금지곡 지정은 가요계에 막강한 타격을 날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금지곡이라면 방송금지 조처에 그쳤으나 이제 한번 금지곡 판정을 받으면 방송금지는 물론 그 곡이 담긴 음반 자체의 생산과 유통, 공연까지 전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금지 사유는 창법 저속, 시의 부적합, 불신풍조 조장, 냉소 등 유치찬란한 것들이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유치찬란하면서 웃기지도 않는다는 점은 불변이다. 더 황당한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겠지만….
김민기의 정규 데뷔 음반이 소리소문 없이 금지반이 된 건 너무나 유명한 일일 것이다. 한대수가 뒤늦게 내놓은 데뷔작이자 명반 <멀고 먼 길>(1974)은 판매금지 조치는 물론 마스터테이프까지 압수되었고, 같은 해 나온 이정선의 데뷔 음반은 한번은 가사 때문에 또 한번은 표지 사진에 나온 장발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세 가지 버전으로 발매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오세은, 양병집, 김의철의 음반들 또한 유사한 과정을 거쳐 공적 소통의 장에서 추방당했다. 1975년작으로 거의 국민가요 급인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송창식의 ‘고래사냥’조차 금지곡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니, ‘거짓말이야’ ‘그건 너’ 같은 지나간 히트곡들이 숱하게 소급적용 되어 금지곡 판정을 받은 일은 일도 아니었다.
금지곡의 타겟이 당대 청년 음악문화를 대표한 록과 포크 음악들이었는지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가장 큰 피해자가 록과 포크 음악이었던 건 사실이다. 오죽하면 ‘금지가요 잘 팔린다’(<경향신문> 1975.8.28.)는 기사가 버젓이 나올 정도였겠는가. 결국 그해 성탄절 이브, 금지가요가 실린 음반의 제작 및 배포를 이유로 일곱 곳의 음반사(당시 등록 음반사는 열 곳에 불과했다!)에 영업정지 처분이 내려진 일은 마지막 숨통을 끊는 일종의 ‘확인사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자리는 ‘건전’이란 가면을 쓴 곡들이 급속히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