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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기념사진이 기억한 요절 천재의 마지막 작품

등록 2018-08-14 04:59수정 2018-08-14 10:32

작품의 운명 ⑩ 김종태 ‘석모주암산’

노을진 주암산 대동강 주변 풍경
빠른 붓질 속에서도 또렷이 묘사
29살, 세상 뜨기 한달 전 전시작
80년간 친구가 조용히 보관하다
유작전 기념사진서 발견, 세상으로
김종태의 1935년 작 <석모주암산>. 1935년 8월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다 장티푸스에 걸려 29살로 생을 등지기 1달전인 그해 7월 그린 작품이다. 평양 근교 주암산의 석양 풍경을 특유의 재빠른 붓질로 명쾌하게 포착했다.
김종태의 1935년 작 <석모주암산>. 1935년 8월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다 장티푸스에 걸려 29살로 생을 등지기 1달전인 그해 7월 그린 작품이다. 평양 근교 주암산의 석양 풍경을 특유의 재빠른 붓질로 명쾌하게 포착했다.
평양 시내 동쪽 대동강 기슭에 자리한 주암산(酒岩山)은 이름 그대로 술의 산이다. 역대 남북 정상회담에서 건배주로 사랑받았던 문배술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이 산 어귀에서 흘러나오는 원천수를 바탕으로 평양 문배주를 빚어왔기 때문이다.

아는 이 별로 없지만,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주암산은 최근 특별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스물아홉 나이에 유성처럼 사라져간 천재작가 김종태(1906~1935)와의 인연 덕분이다. 그가 1935년 8월 장티푸스로 세상을 등지기 1달 전 남긴 마지막 작품이 3년전 재발견됐는데, 그것이 바로 이 주암산의 노을진 풍경을 사생해 담은 유화 소품 <석모 주암산>이다.

덕수궁미술관에서 작가의 또다른 명작 <노란 저고리>와 함께 전시중인 이 작은 풍경화는 83년전 한 여름 저녁 노을지는 주암산과 대동강 주변의 풍경을 잽싼 붓질로 한달음에 그려낸 작품이다. 노을 빛 속에 발갛게 물들어 가는 강물과 산, 들녘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분명히 빠른 속필로 그린 것인데도, 풍경 각 요소들의 묘사가 명확할 뿐 아니라, 그릴 당시의 정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세부의 느낌도 잘 살아있다는 점이다. 주황빛으로 변해가는 강물 위에 간명하게 붓질해 묘사한 돛단배와 군데군데 번뜩이는 푸른빛 물살, 강위로 빛이 비스듬히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공간감과 대기의 흐름 등이 절묘하게 눈에 잡힌다.

17세기 바로크시대 네덜란드의 풍속화 거장이던 프란스 할스처럼 김종태는 붓질이 빠르면서도 소재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포착한 그림으로 생전부터 유명세를 탔다. 미술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독학했으나, 26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한 이래, 4회 연속 특선에, 무려 22점이나 입선했고, 1934년엔 28살에 양화부 최초로 조선인 추천작가가 되는 등 당대의 스타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두주불사의 주당으로 술자리의 기행도 곧잘 벌였지만, 서구의 야수주의나 표현주의 화법까지 섭렵한 이 천재작가는 일본 화단에 결코 굽실굽실하지 않는 꿋꿋한 태도로도 당대 조선화단에 강렬한 인상을 새겨넣고 사라졌다.

김종태의 요절 직후 그의 지인들이 경성 메이지제과 건물에서 열었던 유작전 기념사진. 지인들 뒤쪽에 내걸린 작품들 가운데 기둥 안쪽에 <석모 주암산>의 일부가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이 사진에 나온 그림을 단서로 2015년 입수한 <석모주암산>이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전 출품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종태의 요절 직후 그의 지인들이 경성 메이지제과 건물에서 열었던 유작전 기념사진. 지인들 뒤쪽에 내걸린 작품들 가운데 기둥 안쪽에 <석모 주암산>의 일부가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이 사진에 나온 그림을 단서로 2015년 입수한 <석모주암산>이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전 출품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김종태의 1935년 8월 평양 개인전 도중 작가가 병사하자, 그의 요절을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바로 경성 메이지마치제과에서 유작전을 열었을 당시 출품돼 내걸렸다. 그때 다른 작품들과 함께 지인들의 기념사진 배경이 되었는데, 그것이 80년 뒤 국립현대미술관이 작품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작품은 유작전 뒤 고인의 친구였던 한 사업가가 오랫동안 소문내지 않고 보관하면서 미술판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1972년 덕수궁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에도 잠시 나와 선보였으나 다시 잊혀졌다가, 2015년 이 사업가의 딸이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한 기회에 국립현대미술관 쪽에 알리면서 미술관이 입수해 구입하게 된다. 애초 미술관 쪽은 이 작품이 고인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전 출품작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고 김희대 학예관이 과거 미술관의 근대 전시 출품작을 조사해 남긴 자료 파일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1935년 유작전 기념사진을 발견하면서 김종태 작품세계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지인들 기념 사진 뒤에 조그맣게 드러난 석모주암산 그림의 일부분이 결정적 단서가 됐던 것이다. 김인혜 학예사는 “작품의 운명으로 보면 가장 극적인 발굴 사례로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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