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터에서 나온 보상화 용무늬 전돌. 절의 상징인 용을 측면에 돋을새김해 표현했다. 신라의 용조각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산산조각난 이 돌판 하나가 역사를 뒤흔들었다. 고대와 중세기 한반도 최대 건축물이던 경주 황룡사터 9층 목탑의 심초석(핵심 주춧돌) 아래 사리장치의 사리외함 돌뚜껑이다.
1964년 12월17일 밤 도굴범들은 막 민가가 철거된 경주 구황동 절터에 침입했다. 목탑 심초석을 들어내고 돌뚜껑을 깨부순 뒤 사리장치를 통째로 훔쳐갔다. 2년 뒤 범인들은 불국사에서도 석가탑을 깨부수고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덜미를 잡혔는데, 여죄를 추궁당하자 황룡사 목탑 사리장치 유물들도 한 수장가에게 장물로 넘겼다고 실토했다.
사리가 든 외함, 내함 등의 용기와 명문판, 금합, 은합, 팔각탑, 금동제원통 등의 유물들은 바로 압수돼 국립박물관에 넘겨졌다. 분석해보니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872년 경문왕이 탑을 다시 새로 지으면서 기둥을 세울 때 넣은 명판인 ‘찰주본기’가 나왔는데, 여기엔 645년 선덕여왕 때 처음 탑을 올린 경위와 그뒤 중수 경위가 적혀있었다.
전화위복일까. 보존 여론이 높아지자, 문화재관리국은 1976년~83년 황룡사터에서 당대 최대규모의 발굴조사를 벌여 무려 4만여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그뒤 터를 정비해 지금은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됐다.
황룡사 9층목탑터 심초석 구멍에 있던 사리외함의 돌뚜껑. 이번 특별전에 처음 공개되었다. 1964년 도굴 당시 파괴된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목탑터 동쪽 흙더미에서 나온 부처상.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허공을 향해 깊은 정심(正心)의 눈길을 던지는 자태다.
지난 5월부터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시관에서 석달째 열리고 있는 특별전 ‘황룡사’는 출품유물인 사리돌뚜껑에서 비롯된 비극적 일화를 품으며 이 거찰에 얽힌 역사를 풀어나간다. 553년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자 용궁을 의식하며 사찰로 바꿔 건립한 내력부터 여섯번이 무너지고 여섯번 다시 세운 구층목탑에 얽힌 여러 비화, 신라의 세가지 보물 중 하나인 장육존상, 절의 일상생활까지 숱한 역사적 사실들이 이야기된다.
늪지에 지어진 황룡사의 창건 실화와 물을 다스리는 용왕을 숭상했던 신라인의 의식세계를 용과 관련된 유물들을 통해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전시는 밀도감이 높다. 절반 이상 되는 유물들이 사실상 처음 공개되는 것들로, 교과서 등에서 획일적으로 배웠던 황룡사의 역사 이면에 깔려있는 신라 불교문화의 새로운 진실을 생생히 알려준다. 도굴꾼들이 부순 사리구 덮개돌 조각들을 개막 일주일 전 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내 일일이 모아 복원시킨 것은 중요한 성과다. 깨어진 사리 외함 파편과 찰주본기 실물들을 눈앞에 실견할 수 있다는 감동도 적지 않다. 54년전 충격적인 도굴사건의 전말과 후과들을 그대로 볼 수있는 구성이다.
황룡사터에서 나온 불두(부처상의 머리)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품이다.
황룡사터에서 나온 토제 용머리 장식기와들. 용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소조불 조각과 불두들, 비천상들이 조각된 금 세공장식들을 통해 그 시절 신라인들의 종교적 열정을 짐작하고, 입체영상을 통해 절 금당에 놓였던 본존불과 여러 신상들의 당시 배치현황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명쾌하게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백제 장인들의 영향력이 신라문화에 미친 영향이 막중할 만큼 컸다는 것도 전시는 일러준다. 호남 충청지방의 절터에서 나오는 것과 빼닮은 듯 흡사한 소조불 조각, 백제 장인의 인장이 찍힌 기와 등이 이를 증언하는 유물들이다. 부서진 채로 수장고에 묵혀놓았던 유물들을 한자리에 꺼내어 발굴 30여년만에 처음 황룡사의 총체적인 서사를 풀어냈다는 의미는 가볍지 않다. 단, 600평 미만의 좁은 전시공간에 저마다 다기한 비화들을 머금은 600여점의 유물을 그러모으다 보니 그 숱한 내력들을 올올이 풀어내지 못한 허전함도 남는다. 9월2일까지. (054)740-7500.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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