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센터 2층에 나온 프란시스 알리스의 영상작업 <지브롤터 항해일지>를 관객들이 보고있다. 신발로 만든 배 모형을 든 모로코와 스페인의 아이들이 지브롤터 해협의 양안에서 서로를 향해 바다 속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흘러간다.
‘때로는 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되고, 때로는 정치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화두로 생각을 뭉친 작가가 있다. 그는 세계 곳곳의 경계 지점을 찾아가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파나마 운하 옆 도로에 쪼그린 채 중앙분리선 색깔을 붓질로 칠한 건 약과다. 아프리카와 유럽이 마주보는 지브롤터 해협의 양쪽 해변에 아이들을 불러모은 뒤 바다로 걸어들어가 서로 수평선 위에서 만나보게 하려고 했다. 미국 플로리다 반도와 쿠바섬 사이 바다에 양국 어부들한테서 끌어모은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들려는 ‘해상작전’까지 시도했다.
최근 십여년 사이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와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개인전을 벌이며 현실참여예술의 거장으로 떠오른 프란시스 알리스가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2, 3층에 차려놓은 첫 한국 개인전 ‘지브롤터 항해일지’는 독특한 관람 경험을 안겨준다. 출품작들은 치밀하게 배경과 상황을 준비하지만,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작업들로 이뤄져 있다. 영상과 드로잉 등의 작품들을 조금만 살펴 봐도 작품들의 운명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데, 끌린다. 이런 무망한 행동을 준비하고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고, 몽롱한 환각과 성찰을 안겨준다. 예술의 무력함이 또다른 상상력을 보여주는 근원이 된다는 듯이.
옛 파나마 운하 지대의 도로 중앙분리선을 다시 칠하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담은 행위영상물 <페인팅>(2008)의 한장면. 중남미와 남미를 가로지르는 이 도로를 칠하는 소박한 행위를 통해 프란시스 알리스는 대륙을 가른 ‘분할’의 의미를 되묻는다.
<지브롤터 해협 지도>. 아프리카와 유럽,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해협에 두개의 포크를 걸쳐놓은 이 작품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륙 사이를 오갔던 생존과 삶의 행로를 상징적으로 지드러내고 있다.
프란시스는 벨기에 출신으로 86년 이래 지진구호 활동을 위해 멕시코로 이주한 뒤 멕시코시티를 본거지로 두고 전세계 곳곳의 경계와 국경을 탐색해왔다. 그의 작업들은 미약해 보이는 예술의 언어, 즉 끄적거린 회화나 무망해보이는 듯한 몸짓을 담은 시적인 영상 등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이끌어내곤 한다.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가 지난 8월 30일 아트선재의 전시 개막 행사를 마친 뒤 부근의 다른화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의 뒤에서 빛나는 작품은 미국 작가 댄 플래빈의 형광등 조형물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에 일관되는 요소를 묻자 “세상의 변화에 대해 열린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지브롤터 항해일지>를 보면, 신발로 만든 배 모형을 든 모로코와 스페인의 아이들이 지브롤터 해협의 양안에서 서로를 향해 바다 속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흘러간다. 이들이 결코 수평선에서 만나지 못하지만, 파도와 바람 속에 거품이 일고 소리가 사라지는 생생한 풍경이 함께 연출되면서, 이들을 가로막는 지정학적 경계의 상징성이 부각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아프리카와 유럽,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해협에 두개의 포크를 걸쳐놓은 <지브롤터 해협 지도>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륙 사이를 오갔던 생존과 삶의 행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옛 파나마 운하 지대의 도로 중앙분리선을 다시 칠하는 퍼포먼스를 담은 영상물 <페인팅>(2008)은 중남미와 남미를 가로지르는 경계선 도로를 칠하는 간단한 행위로도 ‘분할’의 의미를 되물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6년 만든 다큐풍 영상 <다리>에서는 쿠바 아바나와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 어민들이 작가의 구상에 따라 배를 긁어모아 해상에 일렬로 다리를 만드는 듯한 광경을 연출한다. 느긋하고 무관심한 듯한 키웨스트의 풍경과 떠들썩하고 공동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쿠바섬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아트선재센터 3층에 전시된 <신발보트>. 2008년 만든 그의 영상물 <지브롤터 항해일지>에서 아이들이 들고 바다로 나갔던 신발보트들을 모아 설치작품처럼 재구성했다.
프란시스는 작품들 속에서 잇는다는 행위를 다기한 방식으로 강조한다. 평생 작업의 과제로 삼아온 선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이를 아이들의 놀이같은 제스처나 신화적 드로잉, 자신의 붓질을 통해 상징적으로 은유한다. 지브롤터 해협에서 건너편 유럽쪽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를 뜨는 모로코 아이들의 놀이를 담은 영상과 베르베르족의 여신 팅가의 이미지를 담은 듯한 거인 여성이 난민들의 배를 옆구리에 끌어안고 해협을 건너는 드로잉 등이 단적인 일례들이다. 작가는 경계와 국경을 둘러싼 사람들의 절박한 상상과 의지를, 관찰과 체험에 바탕한 놀이와 걷기, 끌기, 쌓기 등의 단순하고 강렬한 이미지 유형으로 치환시키면서 ‘시적’이라고 부르는 깊고 풍부한 정서적 울림을 이끌어낸다. 작가 안규철씨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품지만, 절제되고 겸손한 작품 언어로 시적인 매력을 주는 것이 프란시스 작업의 특징”이라며 “정치 사회적 갈등이 복잡한 한국 상황에서 작가들이 미술로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일러주는 작가”라고 말했다. 11월 4일까지. (02)733-8949.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아트선재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