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윤 작가가 찍은 비전향 장기수 박순자(87) 할머니. 경남 하동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빨치산 부대원으로 활동하다 1954년 체포돼 11년 수감생활을 했다. 지금은 부산에서 딸과 살고 있다.
“1959년 체포된 뒤로 이날까지 나를 찍은 사진이 세상에 전시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올해 구순 나이에 접어든 양원진 할아버지는 연단 앞에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북한의 공작원으로 남파됐다가 30년 옥살이를 한 뒤 피아노조율사로 살아왔던 그는 “평생 숨어 살아야 했는데 이렇게 내 모습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서 있는 연단의 뒤쪽과 옆쪽 벽에는 어르신들의 초상 사진이 연달아 붙어 있었다. 분단사의 질곡을 짊어지고 살아온 남녀 비전향 장기수 19명이 검은 막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선 기록이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어르신들의 눈빛과 자세는 대부분 당당하고 기품이 서려있다.
지난 2일 저녁 서울 청운동 사진공간 류가헌에서는 <귀향-비전향 장기수 19인의 초상>전의 개막식이 열렸다. 출품작들을 찍은 작가는 중견 사진기자 정지윤(49·<경향신문>)씨다. 모델이 된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과 장기수 문제를 공론화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이 참석해 축하했다. 정 기자는 지난 여름 한달 남짓 전국 각지의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을 만나 그들의 일상과 초상을 찍었다. 출소 뒤에도 가난과 세상의 험한 눈길 속에 시달리며 살아온 어르신들 삶을 담은 구술까지 갈무리해 사진집 <바꿀 수 없는>(h2출판사)도 함께 냈다.
‘귀향-비전향 장기수 19인의 초상’ 전시는 갤러리 류가헌에서 14일까지 열린다.
내걸린 사진들은 2000년 6·15 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한으로 돌아갈 당시 미처 신청하지 못해 남은 30여명 가운데 작가가 만났던 시점의 생존자 19명의 얼굴과 일상을 포착하고 있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수분,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이광근, 그리고 지난 8월 별세한 김동수씨까지. 지금도 기초생활 생계급여로 연명하는 이들은 퀴퀴한 쪽방이나 통일구호 내걸린 단체 사무실, 혹은 건물의 복도 등에서 노령과 병고에 짓눌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검은막 앞에서 홀로 찍은 초상사진 속 그들은 신념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 존재의 존엄한 일면도 드러낸다.
작가는 작업노트에 “그들은 역경을 이겨낸 만큼 강했고, 풍파를 겪고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담담하게 전해준 그들의 증언은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 생생했다”고 적었다. 전시는 14일까지. (02)720-2010.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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