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명화가 이한철의 필치로 전해지는 어해도 10폭 병풍.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물고기와 게 등의 갑각류 그림은 복을 내려준다는 도상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복을 비는 장식화로 덩치를 키운 어해도 병풍들이 19세기 접어들어 세간에 등장한다.
애초 가리개로 태어났다. 바람 막고 공간을 빚어내다가 집안을 호기롭게 꾸며주는 장식물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바라는 기원물로도 쓰였다. 동서고금의 미술사에서 이렇게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그림은 조선 땅 말고는 일찌기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놀라운 그림 장르의 가치를 거의 몰랐다. 직사각형으로 짠 나무틀에 종이를 바르고 종이, 비단, 삼베에 그린 그림과 글씨, 자수 등을 붙인 변신의 그림 ‘병풍’이다.
지난 6월 개관한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는 몸을 움직이며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조선시대 병풍 그림의 화려한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일부터 시작한 이 미술관의 두번째 기획전 ‘조선, 병풍의 나라’다.
전시장엔 국내 10여개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병풍 76점과 액자 2점이 지하의 드넓은 8개 전시실에서 나뉘어 자리잡은 채 선명하게 빛을 내고있다. 칙칙했던 박물관, 미술관의 기존 전통회화전과 달리 섬세한 조명의 배려가 우선 눈에 확 띄는 이번 기획전은 무엇보다 병풍이란 그림 형식 자체를 국내 처음 핵심 주제로 삼았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병풍이란 일종의 그릇과도 같다. 산수화, 꽃과 새가 들어가는 화조화, 글씨, 민화 등의 이야기 그림이 모두 들어갈 수 있다. 높이 4~5m에 6폭~10폭 정도로 덩치가 커서 공간을 그림 속의 환각과 색감 속에 아우를 수도 있다. 기획진은 3년 이상의 준비과정을 궈쳐 병풍의 폭넓은 쓰임새와 미학을 새롭게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묵죽화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해강 김규진의 월하죽림도 10폭 병풍. 문인화의 단골소재였던 대나무 그림을 장식적인 대형병풍으로 만들어 근대적 미감을 보여준다.
들머리에서 10폭 <금강산도>로 시작되는 병풍들의 대열은 천변만화하듯 흘러간다. 전시 전반부는 궁궐에서 임금이 앉는 용상 뒤에 그려졌던 일월오봉도, 궁과 권세높은 양반가에 들어간 <해상군선도><요지연도> 등의 도교 그림과 궁궐의 경사를 그린 <가례도> 등을 내걸었다. 뒤이어 중반부와 후반부는 모란도 등이 등장하는 화조도, 물고기와 게 등이 등장하는 어해도, 묵죽 등의 문인화 그림을 병풍화로 확대한 대가 김규진의 묵죽도 대작 병풍과 소설 춘향전의 이야기 그림을 담은 병풍, 제주의 토속적인 문자도 민화, 전남 영광의 경치를 그린 안중식의 <영광풍경>, 운보 김기창이 해녀들을 그린 2폭 병풍 등으로 구구절절 흘러간다. 지도를 방불케하는 <기성도> 8폭병풍은 19세기 평양성 일대의 지리적 풍경과 평안감사 행렬을 묘사했고, <태평성시도> 8폭병풍은 그림풍은 중국 색채가 강하지만, 18세기 말 이후 풍족한 생활을 즐기는 사회적 변화를 바탕에 깔고 배경으로 무려 2000명 넘는 인물들이 거리에 등장하는 도시풍속화란 점에서 이색적이다. 구한말 고종으로부터 그림을 하사받고 독일로 돌아갔던 세창양행 창업주의 소장품 <해상군선도>를 경매에서 사들여 치밀한 수리복원 과정과 원래 그림 뒤편의 배접지 유물, 복원과정까지 전시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조선 후기와 말기, 구한말, 근대기 회화까지 18~20세기 한국 회화사의 유장한 역사가 첩첩산맥 같은 거대 병풍들의 행렬 속에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20세기초 평양을 본거지로 활동했던 양기훈의 대작 금니노안도 6폭 병풍. 작가의 특기인 기러기 내려 앉는 장면을 금물로 표현한 호화로운 특제병풍이다.
병풍은 정형화된 형식과 큰 규모 때문에 전시장에서 효과적으로 배열하기가 쉽지않은 장르라고 한다. 기획진은 병풍 출품작들을 대부분은 완전히 펴고 일부는 접은 상태로 배치하고, 작품들을 배치한 전시벽의 동선도 비스듬한 사선 형식으로 만들었다. 관객들이 자연스러게 발품을 들이며 시각을 비롯한 오감을 움직이면서 관람하도록 이끄는 방식을 활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열장 유리패널도 바로 코앞에서 그림의 세부를 볼 수 있도록 작품에 밀착시켰고, 조명도 병풍의 그림 부분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림을 둘러싼 틀의 전체 모습까지 다 볼 수 있도록 투사해 병풍 특유의 유연한 형식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조선, 병풍의 나라’전 전시장. 대나무를 그린 해강 김규진의 대형 병풍이 보인다. 기획자는 단순한 사각형 공간을 벗어나 비스듬한 사선구도로 동선을 만들어 관람에 변화와 긴장감을 유발하려 했다.
4백여점 이상의 그림들이 드넓은 공간에 꼭꼭 들어찬만큼 사이사이 병풍들의 사연을 잇는 일관된 스토리텔링이나 쉬어가는 공간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기획전 사상 전례 없이 수년동안의 준비기간을 투자해 전시 주제를 일관되게 조명하고, 미술관이 전시를 위해 10여점 이상의 작품들을 직접 구입할 정도로, 숱한 병풍수작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의미를 두루 꿰었다는 점만으로도 ‘…병풍의 나라’전은 상찬 받기에 충분하다. 12월23일까지. (02)6040-2345.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