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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백자 한점이 불댕긴 정조문의 조선미술관 열정…‘작아도 번쩍’ 빛나다

등록 2018-11-07 05:00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 30주년 특별전

탄생 100돌 맞는 재일동포 정조문
전재산 털어 유물 1700여점 수집
고인이 아꼈던 도자기·회화·자수
고려 건국 1100주년 명품 등 전시

미술관 이어받은 장남 정희두씨
문화재청 등 지원 마다하고
남-북-일본 잇는 문화 가교 역할
“한일 문화교류 진실 알리기 주력”
특별전 전시장에 나온 미술관 설립자 정조문과 일본인 지인들의 글씨, 애장품들. 가운데 보이는 항아리가 돛단배를 그린 조선시대의 백자철사범선어문호로 미술관의 상징 같은 작품이다. 도자기 위 그림은 일본 작가 아키츠키 아키라가 이 항아리를 묘사한 것이고, 그림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정조문과 일본 문인 시바 료타로의 글씨가 내걸렸다.
특별전 전시장에 나온 미술관 설립자 정조문과 일본인 지인들의 글씨, 애장품들. 가운데 보이는 항아리가 돛단배를 그린 조선시대의 백자철사범선어문호로 미술관의 상징 같은 작품이다. 도자기 위 그림은 일본 작가 아키츠키 아키라가 이 항아리를 묘사한 것이고, 그림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정조문과 일본 문인 시바 료타로의 글씨가 내걸렸다.
조선의 옛 돛단배는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의 상징이다. 자세히 보면 상투를 튼 억센 표정의 어부가 돛을 올리는 나무배가 물고기와 함께 허공을 떠간다. 조선 중기 백자항아리에 그려진 무념무상의 문양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1일 오후 낙엽길을 밟으며 찾은 교토 북쪽 기타야마 주택가의 고려미술관에서 이 돛단배 이미지를 새롭게 만났다. 30여년간 피어린 열정으로 일본에 유출된 한반도 문화재 1700여점을 거액을 들여 모았고, 1988년 그 보금자리로 일본 유일의 한반도 컬렉션 미술관과 재단법인을 세우고 이듬해 2월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기업인 정조문(1918~1989) 선생의 유산이다. 이곳에서 그의 삶과 흔적을 기리는 특별전 ‘정조문과 고려미술관’이 열리고 있었다. 마침 방문한 다음날인 2일은 정조문 탄생 100돌을 맞는 날이었다.

조선 무덤을 지켰던 석수 무인상이 도열한 정문을 지나 1층 전시장에 입장했다. 안쪽 정면 진열장에 정 선생이 가장 아낀 돛단배 그려진 항아리가 놓여져있다. 유물 위로 항아리를 본떠 그린 큰 그림이, 그림 양옆에는 정 선생과 일본 지인의 글씨가 각각 내걸렸다.

그림 왼쪽에 있는 정 선생의 글씨는 ‘期必朝鮮美術館(기필조선미술관)’이라고 쓰여졌다. 1969년 원단(새해 벽두)에 썼다는 기록이 붙었다. ‘반드시 일본에 조선미술관을 세우리라!’는 결의를 꿋꿋하고 힘찬 필획으로 표현했다. 유품에서 발견돼 이번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그림 오른쪽 글씨는 일본의 국민작가이자 정 선생의 친구였던 시바 료타로(1923~1996)의 것. 70년대 미술관 건립을 기원하며 ‘잘 익은 감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덕담을 선이 가늘고 유려한 필치로 써서 선물한 작품이다. 큰 그림 역시 돛단배 그려진 철사항아리를 사랑했던 지인 화가 아키츠키 아키라가 바친 오마주 작품이다. 항아리 아래엔 1960~70년대 재일동포 시인 김달수,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교수, 시바 료타로 등 일본 지인들이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 고대문화 흔적들을 답사하는 모임을 후원하는 자리에서 함께 쓴 격려 글귀가 적힌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주요 출품작중 하나인 조선시대 백자호. 정조문이 1955년 처음 사들이며 수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가 된 ‘1호 컬렉션’이다. 엷은 청백색의 유약빛을 띤 이 백자호는 여느 조선시대 백자호와 달리 두께가 얇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주요 출품작중 하나인 조선시대 백자호. 정조문이 1955년 처음 사들이며 수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가 된 ‘1호 컬렉션’이다. 엷은 청백색의 유약빛을 띤 이 백자호는 여느 조선시대 백자호와 달리 두께가 얇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출품작들은 미술관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각별한 관심과 더불어, 정 선생이 조선문화재를 수집하며 겪은 번민과 고투를 증거한다. 분신이라 할 애장품들은 숱한 일화와 내력을 품고있다. 들머리에 있는 청백색의 빛깔을 띤 얇은 기벽(器壁)의 조선 백자호는 1955년 교토 산조거리의 골동품 가게를 우연히 찾아들어간 정 선생을 매혹시켜 문화재 수집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첫 수집품. 조선 사계절 산수 경치의 오묘한 색감을 십장생 동물들과 함께 담은 자수병풍과 색채추상을 방불케하는 보자기 그림은 그의 앞서간 안목이 빛나는 걸작들이다. 70년대 다른 수집가들이 조선 도자기 수집에 매달릴 때 일본 문화의 원류가 된 조선 전통문화의 진수가 자수와 직물 작품에 있다는 선견지명으로 입수한 것들이다. 사자 모양 꼭지가 달린 청자도장은 ‘長生無極(장생무극)’이란 글자를 새긴 인장예술의 최고 명품. 개관 뒤인 1998년 도난당한 뒤 고인의 맏아들인 정희두(59)씨가 일본 각지 수백여곳의 골동상을 수소문한 끝에 되찾은 내력을 지녔다. 학예부장인 정씨는 “고인이 각별히 아꼈던 도자기, 회화, 자수 등의 대표작 80여점을 선별했고, 올해가 고려 건국 1100주년임을 감안해 전시 후반부에는 청자와 거울, 동종 등의 고려 명품들도 별도로 내놓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교토 시내 북쪽 주택가에 자리잡은 고려미술관의 정면. 문 옆을 지키고 선 무인상 석수의 모습이 보인다.
교토 시내 북쪽 주택가에 자리잡은 고려미술관의 정면. 문 옆을 지키고 선 무인상 석수의 모습이 보인다.
정 선생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7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에 이주했다. 식민지 시대 유년기를 거쳐 해방 뒤 막노동, 파친코와 식당 사업으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하면서도 노골적인 차별과 멸시를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우연히 50년대 골동상점에서 백자를 실견한 것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조선 문화재를 각별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무언가 풀어야할 모순을 느끼게 된다.

“미술관을 지어야 한다는 부친의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그렇게 멸시하면서도 백자 등의 조선 문화유산은 그리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이 발단이었죠. 고대부터 한국 문화는 일본 문화의 원류였고, 17~19세기 조선시대 통신사 교류에 이르까지 기적적인 평화선린의 문화사를 쌓았는데도, 이런 흔적들이 양국에서 잊혀지고, 계승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간파했던 겁니다. 부친이 60여년전 처음 조선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뒤 일본의 지식인들과 마음을 모아 일본의 조선문화 유산, 유적들을 답사하면서 <일본 속의 조선문화>라는 잡지를 1969년부터 81년까지 발간했던 것도 다 그런 의미로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미술관 창립자 정조문의 맏아들인 정희두 학예부장.
고려미술관 창립자 정조문의 맏아들인 정희두 학예부장.
고려미술관은 개관 이래 90여차례의 전시를 하면서 23만명이 입장했지만 적자를 면한 적이 없다. 파친코사업을 하는 정희두씨가 해마다 업체에서 2천만엔 이상의 운영비용을 끌어오는 출혈을 감수하지만, 매년 3차례 기획전을 하는 원칙은 깬 적이 없다. 성과도 적지않다. 70년대 정 선생이 처음 본격적으로 구입한 조선통신사 유물 컬렉션은 그동안 6차례의 전시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영화까지 만들어지면서 조선통신사를 양국 공통의 역사적 관심사로 부각시켰으며, 지난해 관련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이번 특별전의 또다른 볼거리인 고려시대 수집품들. 올해 고려왕조 창업 1100주년을 맞아 고려시대의 청자와 향완, 범종 등도 상당수 출품됐다.
이번 특별전의 또다른 볼거리인 고려시대 수집품들. 올해 고려왕조 창업 1100주년을 맞아 고려시대의 청자와 향완, 범종 등도 상당수 출품됐다.
열악한 재정 여건과 항상 씨름해야하는 것은 고려미술관의 숙명과도 같다. 정씨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어느 한쪽에도 기대지 않겠다는 부친의 유업을 받들어, 문화재청 등 국내에서의 여러 지원 제안들 대부분을 사양해왔다고 했다. 미술관 이름을 첫 통일국가 고려에서 따온 것처럼 일본에 있는 또다른 한반도의 통일 광장으로서, 현지에서 남북과 일본, 재일동포를 잇는 문화의 가교 구실을 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정 선생의 뜻에 공감하는 이노우에 미츠오 관장을 비롯한 일본 역사학계, 고고학계, 예술계 인사들의 지원과 응원이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며 그는 덧붙였다.

“개관 뒤 수년간 거의 관객이 안왔습니다. 그때 운영위원인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교수에게 푸념했더니 ‘작아도 번쩍 빛나는 미술관이 소중하다. 한 사람이라도 한일 문화 교류의 진실을 바로 알리는데 주력하자’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 애쓰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시는 12월11일까지.

교토/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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