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에서 펼쳐진 2018부산비엔날레 전시현장. 임민욱 작가의 대형설치 작품을 관객들이 보고있다.
잔치는 조용히 끝났다.
9월초 서울, 부산, 광주 등 대도시에서 잇따라 개막했던 국제 미술 큰 잔치인 격년제 비엔날레 행사들이 이달초 모두 막을 내렸다. 규모와 이벤트를 내세우며 떠들썩하게 시작한 개막과 달리 지금 미술판은 행사가 열린 사실 자체를 알기 어려울 만큼 잠잠하다. 전혀 화두가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사실 올해 비엔날레들은 규모나 공간, 구성 등 외양 면에서 눈길을 끌만한 요소들이 적지 않았다. 11명의 국내외 기획자가 43개 나라 작가 165명과 함께 9개나 되는 본전시판을 꾸리고 외국 전시기관의 파빌리온과 대가들의 특별 야외전까지 꾸린 광주비엔날레는 해방 이래 역대 미술행사 가운데 최대규모란 말이 나왔다. 부산 비엔날레는 철새도래지 을숙도에 건립된 부산현대미술관과 도심 용두산 기슭의 옛 한국은행 건물로 전시공간을 옮기며 쇄신을 꾀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차린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는 4명의 복수 기획진과 출품작가들 속에 비미술인이 다수 들어가면서 새 틀거지의 인문 예술제를 표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뚜껑 열린 비엔날레들은 차별적이고 참신한 콘텐츠를 내놓는데 실패했다. 난민, 이산, 민족주의 등의 범세계적인 화두를 영상, 설치, 사진, 회화 등의 잡다한 형식과 개념으로 나열하는 기존 비엔날레의 유행을 되풀이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지자체 주도 행사에서 벗어난 미술계의 독자적인 운영모델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광주비엔날레 재단과 부산비엔날레 조직위는 지난주 결산자료를 내어 3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고 국내외 정계, 미술계 유력인사들의 방문이 이어졌다고 자찬했지만, 미술계 반응은 싸늘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차려진 올해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관객들이 쿠바 작가 크초의 초대 비엔날레 출품작을 감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질인 벼락치기 준비의 관행이 올해는 더욱 악화된 양상으로 되풀이되었다. 2년마다 열리는 형식이 무색하게 전시감독 선정과 기구 재편 등으로 개막 7~8개월 전에야 기획진이 꾸려졌다. 세계 미술의 새 화두를 제시하거나,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은 묻히고, 단기간에 전시 덩치를 키울 수 있는 집단기획진 시스템 아래 구작 위주 출품작들이 기획자 각각의 영역 위주로 구성돼 전시주제의 집중도를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상상된 경계들’이란 주제를 내건 광주 비엔날레는 난민, 냉전, 정보 격차, 성차별 문제 등에서 드러낸 현대의 경계를 조망한다는 취지를 내걸었지만, 전시장이 분산됐을 뿐 아니라 출품작가 중복에, 이질적인 북한 미술 소개전까지 끼어들었다. 시내 곳곳에 세계 각지 미술기관의 파빌리온 전시까지 열려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외양을 흉내낸 미술 엑스포라는 혹평이 나왔다.
부산 비엔날레는 전시감독과 주제가 확정된 5월부터 전시 준비가 본격화됐다. 외국인 전시감독과 기획진의 갈등과 소통부재까지 겹치면서 개막 자체가 기적이란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란 주제 아래 분리와 대립의 시대를 조망한 전시의 작품 내용들은 광주 비엔날레의 본전시 작품들과 상당수 중복돼 광주 분관 전시를 보는 것 같다는 촌평도 나왔다. ‘좋은 삶’을 주제로 내건 서울의 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콜렉티브란 이름으로 집단기획체제를 표방했으나, 역시 촉박한 준비일정에, 기획자들의 견해차이가 컸고 핵심 기획자인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성추문으로 하차하면서, 21세기 미래적 삶에 대한 담론 찾기는 별다른 결실을 내놓지 못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전시 광경.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광주비엔날레는 옛 국군통합병원 폐건물에서 국외대가들이 광주항쟁의 상처어린 기억을 색다른 어법으로 되살린 설치작업 특별전을 벌여 관심을 모았다. 부산비엔날레도 전시장으로 고른 옛 은행건물의 공간미학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그러나 비엔날레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는 단발적인 공간 마케팅에 그쳤다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다. 독립기획자 양지윤씨는 “비엔날레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지 않고, 기획자들을 갈라 역할 놀이와 보여주기식 성과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미술계에서는 지자체의 지역 마케팅 전략에 휘둘려 비슷한 시점에 여러 도시의 비엔날레가 몰리고, 단기간에 급조하는 관행부터 혁파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구 처럼 비엔날레가 끝나기 전에 차기 행사의 전시감독과 기획 방향의 큰줄기를 확정해 충분한 준비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비엔날레마다 전시 콘텐츠가 중복되는 맹점을 피하기 위해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미술계의 한 중견 기획자는 “광주와 콘텐츠가 비슷한 부산 비엔날레의 경우 3년마다 열리는 트리엔날레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서울 미디어시티비엔날레도 원래 설립취지인 미디어아트 특화 전시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광주비엔날레 재단·부산비엔날레 조직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