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다시 본다’전의 출품작 중 하나인 임옥상 작가의 설치작품 <허허금강>. 철창 속에 갇힌 부처의 머리상(불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엄학의 대가였던 신라인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의미를 되살피며 지은 <법성게>의 싯구들을 불두 전면에 뚫음 기법(투각)으로 새겼다.
국립중앙박물관과 14개 지방박물관으로 이뤄진 국립박물관은 국내에서 가장 큰 고미술·고고학 컬렉션을 품은 문화유산 보고다. 그만큼 다른 문화장르에 대해선 문턱이 높기로도 유명하다.
해방 이후 유물 말곤 다른 장르의 단독 전시를 일체 하지않았던 국립박물관의 불문율이 깨지게 됐다. 연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사상 최초로 현대미술 작품들로만 꾸민 전시회가 막을 올린다.
경주박물관은 14일부터 경내 특별전시관에서 ‘신라를 다시 본다’는 제목으로 국내 중견·소장 현대미술가 6명의 신구작들로 꾸민 기획특별전을 시작한다. 내년 3월3일까지 열리는 이 특별전은 경주의 신라 전통문화유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박대성, 임옥상, 정종미, 김승영, 이이남, 이흥재 작가의 그림, 영상, 설치, 사진 작품을 213평 공간에 펼쳐놓는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옮긴 유병하 전 관장이 미술사가이자 현대미술기획자인 김영순, 윤범모, 조은정씨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학예사들과 함께 2년여 동안 공들여 준비한 작품마당이다.
국립박물관 70여년 역사상 기획전시를 현대미술로 모두 채운 것은 전례가 없다. 전시 기획자인 김도윤 학예사는 “역사적 유물과 현대미술 작품들의 콜라보(협업) 전시는 없지 않았으나,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품만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발상과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처음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설화의 왕국 신라에 얽힌 다양한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자유롭게 펼쳐 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박물관 최초의 현대미술기획전 ‘신라를 다시 본다’가 열리는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전시 얼개도 기존에 유물을 중심으로 한 고답적 배치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임옥상 작가는 철창 속에 철판으로 만든 부처의 머리상(불두)을 형상화한 <허허금강>과 함꼐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의 소리가 전세계 갈등과 고통의 현장으로 퍼져나가는 3채널 영상물 <월인천강-신라의 소리>를 내놓았다. <허허금강>은 의상대사가 <화엄경>의 의미를 설명한 <법성게>의 싯구들을 불두 전면에 뚫음 기법(투각)으로 새겨 이 시대 화해와 소통의 정신을 성찰한다. 명상적인 설치작업들로 유명한 김승영 작가가 재현한 반가사유상도 주목할 만하다. 생로병사에 얽힌 고민을 사유하는 싯다르타 태자를 재현해 슬픔, 분노, 기쁨 등의 감정에 얽힌 단어들이 적힌 벽돌 바닥 위에 올려놓고, 관객에게 무언의 대화를 권한다. 경주 분황사, 다보탑의 정경을 그린 박대성 화가의 대작과 경주 왕릉의 풍경을 포착한 이흥재 사진가의 흑백 사진, 선덕여왕의 자태를 특유의 채색 종이 콜라주 작업 형식으로 표현한 정종미 작가의 신작, 빛을 주제로 경주문화유산들의 정취를 동영상으로 담은 이이남 작가의 비디오아트 작업들도 나온다. 준비작업을 총괄했던 유병하 전 관장은 “단절감을 주는 전통유산들을 관객들에게 살아있는 실체로 이어주는 것이 지금 박물관의 역할이라는 데 모두 공감하면서 즐겁게 전시를 꾸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임옥상 작가·국립경주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