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현 한예종 무용원 명예교수가 춤 공연 촬영 장비를 앞에 두고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92년부터 춤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해 지금껏 5천여 편을 찍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지난달 21일 서울 홍대입구역 가까운 곳에 ‘춤인문학습원’이란 문패를 내건 공간이 생겼다. 지난 8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에서 정년 퇴임한 김채현 춤평론가가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 “춤을 인문학 관점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키우려고요. 무용의 역사나, 무용을 철학, 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공부를 하려고 해요. 춤인문학을 본격적으로 일으키고 싶어요. 먼저 내달 8일부터 5주 일정으로 ‘커뮤니티댄스 이론 강좌’를 합니다. 젊은 무용인들이 고생을 많이 합니다. 이런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공론화도 해야죠.” 지난 30일 춤인문학습원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그는 김채현춤뮤지엄(가칭)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1992년부터 춤 공연이나 축제 현장을 직접 촬영한 5천여 편의 영상을 인터넷 공간에서 대중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3년 전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영상을 기증하겠다고 약정까지 했으나 직접 박물관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단다. “영상물마다 제목과 개요를 달고 불필요한 촬영분은 자르는 편집이 필요한 데 도서관 쪽의 재원 확보가 쉽지 않았어요. 영상물은 빼고 제가 모은 춤 공연 팸플릿 3천여점만 도서관에 기증했어요.” 그는 자신이 작가적 시선에서 찍은 수천여편의 춤 영상물은 갤러리나 게임 등 여러 문화 현장에서 다채롭게 쓰일 수 있다며 “뜻을 같이하는 단체나 개인을 공모해 함께 뮤지엄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92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중요한 춤 공연은 대부분 촬영했어요.” 작년에도 150편이 넘는 춤 공연을 찍었단다. “무대가 오르기 한 시간 전에는 공연장에 도착해요. 캠코더 촬영 장비는 공연장 음향실 앞이나 옆에 설치합니다. 공연 내내 서서 캠코더의 줌인, 줌아웃 기능을 작동하죠. 다리가 아프면 좌석 바닥 부분을 세워 그 위에 엉거주춤 걸터앉아요.”
‘촬영 노동’과 ‘비평가의 공연 분석’은 충돌하지 않을까? “비평가는 작품에 100% 몰입할 수 없어요.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죠. 촬영을 5년 정도 한 뒤로는 완전히 익숙해졌죠.” 그는 무대를 촬영하는 춤비평가는 자신이 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할 것이라고 했다. 왜 촬영을? “80년대 초 무용비평을 시작할 때 어둠 속에서 다 적었어요. 메모를 보고 작품의 전체 흐름을 기억해냈죠. 너무 힘들었죠. 작품이 20분을 넘어가면 그 흐름을 기억해내는 게 예삿일이 아니죠.” 객관적이고 엄밀한 비평을 위해 캠코더를 들었다는 얘기다.
이는 “근거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활 철칙과도 맞닿아 있단다. 그는 자신의 말의 근거를 위해 어릴 때부터 자신과 관련한 자료는 다 가지고 있다고 했다. “대학 시절 책은 물론 당시 쓴 가계부까지 지금도 버리지 않고 다 가지고 있어요. 기록하는 습관이 촬영하는 습관으로 확장했죠.”
김 교수가 2012년 촬영한 <봄날은 간다> 공연 영상 옆에 섰다. 강성만 선임기자
그는 86년 서원대 교수로 부임해 중앙대를 거쳐 96년 한예종 무용과가 창립했을 때 이 대학으로 옮겼다. 서울대 철학과 73학번으로 석사 과정은 모교 미학과에서 마쳤다. “학부 때 문화예술에 대한 동경이 컸어요. 공연 현장을 많이 찾아다녔죠. 그때는 도서관을 가도 예술 분야는 읽을 책이 없었어요. 74년에 ‘서양미술사’ 책은 장발 선생이 1948년에 번역한 책이 딱 한 권 있었죠. 내가 어느 분야든 예술연구를 하겠다는 맘으로 미학과 대학원에 갔죠.” 춤 연구자가 된 데는 석사 논문 주제인 ‘미적 체험’과 관계가 있단다. “미적 체험을 파고들면서 예술과 몸은 유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는 몸을 고도의 예술로 실현할 수 있는 장르는 춤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죠.”
최근 사재 털어 ‘춤인문학습원’ 열어
‘커뮤니티댄스 이론 강좌’부터 시작
“젊은 무용인들 어려움도 공론화하려”
공연 영상 ‘김채현춤뮤지엄’도 추진
1992년부터 직접 촬영 5천여편 공유
“엄정한 춤비평하고자 캠코더 들어”
그는 84년 석사 학위를 따고 2년가량 시간 강사를 하다 대학 전임교원이 됐다. 박사 학위는 지금도 없다. “대학원 졸업 몇 년 전부터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석사를 딸 무렵 우리나라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자의식이 성장하기 시작했어요. 민중, 민족예술도 활성화했죠. 그때 내가 유학을 가 10년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런 마음이 들더군요. 지금 여기서 내가 우리 문화예술에 기여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죠.”
이름 ‘채현’은 필명이다. 본명은 종원이다. “제가 존경하는 단재 신채호와 익재 이제현 선생에서 한 자씩 땄죠. 두 분은 우리 주체성을 지키면서 다른 것을 받아들였죠.” 그가 90년대 중반 이후 10년 이상 한국민예총 민족춤위원장을 지내며 민족춤제전을 10차례 이끌어온 것도 이런 정신에 터했을 것이다. 그가 강강술래를 디지털 상상력과 결합해 기획한 2006년 11회 민족춤제전(새 강강술래)은 끝내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행사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다. “97년 민족춤제전에선 ‘여성, 우리 세상의 절반’이라는 주제로 여성 문제를 다루기도 했어요. 2005년 10회로 끝났지만 무용가분들에게 사회 문제나 문명의 이슈도 춤에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 걸 보람으로 느낍니다.”
김 교수는 자신과 관련한 자료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춤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70년대 대학 시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촬영 영상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창작열을 잃지 않은 무용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제자들과 함께한 공연이 있어요. 7년 전 김매자 선생이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한 <봄날은 간다> 공연이죠. 작품평도 좋았고 제가 찍은 영상도 괜찮아요. 육완순 선생의 <지저스크라이스트> 공연은 74년 시작했는데 그간 찍은 영상이 별로 없어요. 제가 90년대 중반부터 2천년대 초반까지 네 번 찍었어요. 한 작품을 여러 번 찍어 사료가치가 있죠.”
그는 2학기에도 한예종에서 1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90년대 말 개설해 지금껏 맡아온 ‘춤과 사회’ 강좌다. 왜 ‘춤과 사회’인가? “학생들에게 사회가 원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일치시키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사회가 원하는 것에도 선택지가 많아요. 그런 명분을 갖지 못하는 공부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예술가의 치명적 약점은 예술가는 고고한 낭만주의자라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덜한 편이지만 일제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이죠. 예술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나누는 것입니다.”
춤의 매력은? “생명의 발현이 춤의 핵심이죠. 춤은 호흡과 긴밀히 연관돼 있어요. 그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