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와 트로트 고고의 등장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34) 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와 트로트 고고의 등장
그래도 음악은 계속되어야 했다. 유신정권이 한국 팝에 발행한 부고장이나 다름없던 1975년 말 대마초 파동으로 만 6년여 동안 가요계의 지형을 변화시켜온 청년음악의 주역 대부분이 싹쓸이된 후에도, 음반은 계속 나와야 했고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의 전파도 지속적으로 송출되어야 했다. 지난 회에 보았듯 1976년의 가요계는 ‘갑작스런 진공 상태 같았다’는 투의 회고가 주류를 이룬다. 사실일까.
그해 어느 방송국의 ‘10대 가수’로 선정된 이들은 송대관, 송창식, 박상규, 김훈, 금과 은, 정미조, 김상희, 조미미, 하춘화, 김인순이었다. 다른 방송국의 리스트도 별 다르지 않았다. ‘10대 가수’의 면면을 일별해 보면 우선 가요계에서 잔뼈 굵은 가수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송창식, 김훈, 김인순 등 대마초 파동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신곡이 아니라 ‘왜 불러’, ‘나를 두고 아리랑’, ‘여고졸업반’ 같이 이미 1975년에 히트한 곡들의 인기가 지속된 결과란 점이 이채롭다. 이는 기성 가수인 정미조(‘불꽃’)나 박상규(‘조약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기 차트가 수시로 변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는 히트곡의 인기가 오래 지속되는 편이었다고는 해도 상식적인 현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와 같이 1976년의 가요계는 ‘지난 겨울에 사라진’ 청년음악의 기수들의 공백이 커 보였다. 혹시 ‘콘텐츠’가 부족했던 것일까. ‘1976년 한 해 동안 연예협회에 새로 등록한 가수가 140여명,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 곡이 8천여 곡을 상회했는데, 이는 예년의 두 배에 해당되는 숫자였다’는 요지의 기사를 보면 통념과 달리 오히려 그 수는 풍성했던 셈이다. 하지만 가요 음반 판매량은 하향평준화되어 가장 많이 팔린 송대관의 음반조차 판매고는 2만여 장에 불과했다는 게 기정사실이었다(<경향신문>, 1976년 12월 16일치). 공백을 메울 만한 신인 가수와 음반들은 쏟아져 나왔으나 저조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76년 말에 시작해 이듬해에 대박을 터뜨린 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용필, 최헌, 윤수일이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각각 ‘돌아와요 부산항에’, ‘오동잎’,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크게 히트시켰다. 이들 곡이 실린 음반은 10만 장을 넘나드는 판매고를 기록하며 주름 가득했던 음반업계의 인상을 펴주었다. 그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조용필, 최헌, 윤수일이 모두 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라는 것, 그리고 히트곡들은 트로트 선율과 그룹 사운드의 고고 리듬을 결합한 새로운 양식, 이른바 트로트 고고라는 데 있었다.
그 점에서 앞서 언급한 ‘10대 가수’ 중 김훈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다. 김훈은 1970년대 초부터 다운타운가에서 높은 인기를 모아온 그룹 사운드 ‘트리퍼스’의 프론트맨이었고(그룹 이름은 ‘10월 유신 식 창씨개명’으로 인해 1975년께 ‘나그네들’로 바뀌었다), 그가 부른 ‘나를 두고 아리랑’은 트로트 고고 유행의 상징적 전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김훈, 조용필, 최헌, 윤수일이 선도한 뒤로 장계현, 조경수, 최병걸, 함중아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길을 밟아 성공을 거두었다. 정리해 미리 말하면 ‘그룹 사운드 출신 솔로 가수가 부르는 트로트 고고’는 1970년대 후반 가요 트렌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다. 트로트 고고는 상업적 성공은 거두었지만 기존 한국 팝의 팬들, 그리고 진지한 청자들에게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로쿠뽕’이란 당대의 용어가 시사하듯 간단히 무시 혹은 비난을 가하면 그만일까. 좀더 면밀히 검토하고 얘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음에 계속하자.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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