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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세월의 밭고랑’ 제주 할망의 얼굴

등록 2020-03-15 16:39수정 2020-03-16 02:02

[리얼리즘 작가 이명복 개인전 ‘삶’]
10여년 제주살이 하며 작품활동
제주 신화 속 여신같은 할머니들
4·3항쟁 바탕으로 재해석한 풍경
20일까지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전시
올해 완성한 신작 <해녀 옥순 삼촌> 앞에 선 이명복 작가. 바다에서는 해녀, 뭍에서는 농부로 일하며 평생을 살아온 제주의 이웃 할머니들 얼굴에서 작가는 산맥의 형상을 보았다고 말했다.
올해 완성한 신작 <해녀 옥순 삼촌> 앞에 선 이명복 작가. 바다에서는 해녀, 뭍에서는 농부로 일하며 평생을 살아온 제주의 이웃 할머니들 얼굴에서 작가는 산맥의 형상을 보았다고 말했다.

옥순씨, 오태순, 춘화 삼촌…그네들 얼굴은 삶이고 밭이었다.

그림 속 제주섬 어르신들의 표정에 고랑 패듯 인생 밭을 일군 주름이 피었다. 과거 지나온 삶의 흔적들이다. 평생 해녀와 농부로 뭍 것, 바다 것을 거둔 할머니들의 얼굴은 가까이서 보면 추상회화요, 멀리서 보면 오랜 연륜의 흔적을 담은 극사실 초상화다. 60줄 넘어선 작가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어선 화풍의 새 돌파구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6년 만에 서울 개인전을 차린 이명복(62) 작가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는 리얼리즘은 어떻게 포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이제야 겨우 찾았다”고 털어놨다.

&lt;수원 해녀 삼촌&gt;(2020)의 일부분.
<수원 해녀 삼촌>(2020)의 일부분.

지난 4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이명복 개인전 `삶’은 작가의 변화한 생각과 시선을 읽을 수 있는 자리다. 그는 1982년 결성된 민중미술 진영의 현장미술동인 ‘임술년’ 그룹 출신이다. 지난 30여년간 외세와 권력이 휘감아온 한반도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역사적 현장을 극사실적 묘사와 초현실적 구도가 버무려진 화풍으로 그려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화풍을 확연히 틀갈이했다. 직설적인 비판, 풍자의 요소를 걷고 사람과 풍경 자체에 주목한 작품을 냈다.

그는 2010년 강화도에서 제주 한림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런데 출품작들은 대부분 지난해와 올해 초 완성한 것이다. 섬 어르신들의 얼굴을 2m가 넘는 화폭에 확대해 그린 초상화와 할머니들이 밭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거인처럼 확대해 그린 그림이 눈에 띈다. 단순한 구도 같지만, 7~8년간 신작을 거의 내지 않는 잠행 끝에 나온 작업이라 고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lt;4월의 숲&gt;(2020). 봄날 햇살을 받는 제주 섬의 곶자왈 숲 한구석을 부각해 그렸다.
<4월의 숲>(2020). 봄날 햇살을 받는 제주 섬의 곶자왈 숲 한구석을 부각해 그렸다.

“입도할 때 제주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작업해보자고 생각했는데, 4~5년간은 작업이 손에 묻어나오질 않는 겁니다. 뒤늦게 지인과 이웃의 말을 듣고 4·3항쟁에 얽힌 제주 사적지와 탐라국 이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림이 손에 잡혔어요. 2014년 제주 동쪽 선흘에서 불탄 뒤 다시 싹을 틔운 ‘불카분낭’이란 나무를 그리면서 제주 풍경을 손대기 시작했지요. 역사와 사람을 염두에 두면서 풍경 작업을 하다 보니, 2년 전부터 제주 곶자왈 숲과 섬 어르신들을 크게 부각해서 그리는 쪽으로 붓질이 모였어요.”

어르신들의 얼굴과 밭일하는 모습을 거인처럼 그리는 작법은 물질과 농사일을 하면서 가족의 가장 노릇을 한 옥순씨와 춘화씨를 2017~2018년 이웃으로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작가는 “산맥과 강처럼 곳곳이 주름지고 풍상을 인 얼굴이지만, 삶에 회한이 없고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제주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용모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이런 여신적 용모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 자연스레 거인처럼 큰 구도로 그리게 됐다는 말이다.

&lt;폭포&gt;(2017). 4·3항쟁 당시 학살 현장 중 하나인 정방폭포를, 당시 역사적 상흔을 떠올리면서 초현실적인 색감과 구도로 재현한 그림이다.
<폭포>(2017). 4·3항쟁 당시 학살 현장 중 하나인 정방폭포를, 당시 역사적 상흔을 떠올리면서 초현실적인 색감과 구도로 재현한 그림이다.

전시장 2층에서는 섬의 역사를 바탕으로 제주 풍경을 재해석한 근작들도 내걸렸다. 섬 중산간의 뒤엉킨 곶자왈 숲에 70년 전 4·3항쟁 참여자들의 시선을 투영시켰다. 녹색, 붉은색, 푸른색 톤으로 재현한 <4월의 숲> 같은 연작과 학살 현장인 정방폭포의 상흔을 붉은 색감으로 재현한 <폭포> 등은 특유의 초현실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이 전시의 다른 주목 작이다. “섬 할머니들의 노동 광경에서 성화를 보는 듯한 감동에 사로잡혀 사람과 풍경의 깊이에 눈떴다”고 말하는 작가는 대작 인물화를 계속 그리면서 4·3항쟁을 다룬 또 다른 구도의 역사 풍경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2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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