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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가수·뮤지션·멘토·제작자 신승훈…“마지막 갖고픈 ‘얼굴’은 아티스트”

등록 2020-03-29 16:12수정 2020-03-30 17:40

【데뷔 30주년 맞은 신승훈 인터뷰】

‘발라드의 황제’? “때론 족쇄였죠”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해
1~7집까지 연속 100만장 돌파
‘신승훈 스타일’에 갇히는 게 싫어
디스코·국악·힙합·아르엔비 등 도전

“대중과 다소 멀어졌던 시기지만
‘8·26 사태’로 불리는 10주년 공연
그 때를 계기로 공연에 집중했었죠”

“조용필 형님에 비하면 전 아직도…”
20주년 돼서야 허락한 리메이크
후배들과 작업이 좋은 자극제로
멘토·신인 발굴하며 제작자로 변신

“30주년 기념 앨범엔 신곡 8곡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얘기죠
시대·국경 초월하고 공감받는
그런 노래 만드는 게 남은 소명”
“지금 라디오를 켜봐요~”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더 이상은 슬프지 않아~”

신승훈은 자신의 노래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후렴구를 불러줬다. 그와의 전화 인터뷰는 내내 ‘라이브 공연’ 같았다. 데뷔 30년차 ‘발라드의 황제’가 들려주는 히트곡 모음이라니, 어떤 세레나데가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있을까.

“30년 동안 구설 하나 없이 음악만 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신승훈은 “무언가를 숨기면서 아닌 척한다면 비결이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기에 비결이랄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전화 인터뷰 내내 노래까지 불러주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그 정답이 있다. ‘발라드의 황제’라는 영예로운 별칭으로, 다양한 장르의 곡을 직접 만드는 싱어송라이터로, 후배들의 멘토이자 제작자로, 지난 30년간 꾸준히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과 자부심일 것이다.

다음달 8일, 데뷔 30주년 기념 스페셜 앨범 <마이 페르소나스>(My Personas)를 발표하고, 6월 전국 투어를 앞둔 신승훈을 지난 24일 전화를 통해 만났다.

1990년 ‘미소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한 신승훈. ‘어게인 가요톱텐’ 화면 갈무리
1990년 ‘미소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한 신승훈. ‘어게인 가요톱텐’ 화면 갈무리
■ ‘발라드의 황제’ 별칭 굳힌 10년 신승훈은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가수” 유재하의 3주기 기일인 1990년 11월1일,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했다. 이후 신승훈은 2집 <보이지 않는 사랑>(1991)으로 연타석 홈런을 친 뒤, 급기야 5집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1996)으로 247만장의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1집부터 7집까지 연속 100만장 이상 판매라는 기록도 세우며 ‘발라드의 황제’ 자리를 공고히 했다. “제가 데뷔했을 땐 신선한 목소리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러나 언젠가부터 무슨 노래를 불러도 ‘신승훈 스타일’이라고 해서 제 목소리가 싫어지기도 했어요. ‘발라드의 황제’가 때론 족쇄가 됐죠.”

서정민갑 평론가는 신승훈을 “9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라고 평가했다. “신승훈은 한국 발라드를 고급화한 주역이자 음반 시장이 가장 흥했던 시기, 그 시장을 가장 크게 확장시킨 인물이다.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명일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라고 평가했다.

오랜 시간 가요계의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음악에 관해서만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치밀하고 꼼꼼한 그의 성격 덕분이기도 하다. 신승훈의 세션맨으로도 활동했던 기타리스트 박주원은 “수많은 가수의 세션을 했지만 신승훈 형님만큼 조명, 음향, 세션 연주 등을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조명이 비추는 위치도 1초 차이로 계산해 리허설을 할 정도”라고 말했다.

■ 다양한 장르·콘서트에 집중한 20년 대중은 ‘발라드의 황제’라는 별칭으로만 그를 기억하지만 사실 신승훈은 한 장르에만 갇혀 있진 않았다. 그는 데뷔 10주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디스코풍의 ‘엄마야’(2000), 뉴에이지 장르의 ‘애이불비’(2002), 국악을 접목한 ‘애심가’(2004)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라디오 웨이브>(2008)와 <러브 어클락>(2009) 앨범을 연이어 내며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모던록, 아르앤비(R&B), 힙합, 펑키 디스코 장르에까지 도전했다.

차우진 평론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며 다양한 시도를 했던 점이 인상적”이라며 “90년대를 상징하는 스타로 남을 수도 있겠지만, 안주하지 않고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 직업인으로서의 음악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신승훈은 이 시기를 “대중과는 다소 멀어졌던 시기”라고 평가했다. 장르의 변화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았던데다 방송보단 공연에 집중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팬들이 ‘8·26사태’라 부르는 10주년 콘서트 날이었어요. 폭우가 쏟아져 걱정했는데 1만2천명의 팬이 3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공연을 즐겼어요. 이날의 감동을 계기로 공연에 더 집중하게 됐어요. 전 쉬지 않고 공연 중이었는데,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요즘 왜 안 보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죠.”

2002년 1월, ‘엄마야’를 부르는 신승훈. ‘KBS 깔깔 티비’ 화면 갈무리
2002년 1월, ‘엄마야’를 부르는 신승훈. ‘KBS 깔깔 티비’ 화면 갈무리
■ 멘토·제작자로 활약한 30년 다른 가수에게 자신의 곡을 주지도, 남의 곡을 받지 않고 심지어 자기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신승훈에게도 20주년을 지나는 시점엔 변화가 생겼다. 20주년 앨범에서 후배들이 그의 히트곡 7곡을 부른 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후배 가수와의 작업은 신승훈에게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는 2010년 <위대한 탄생>(문화방송), 2012년 <보이스 오브 코리아>(엠넷) 등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해 멘토로 활약했다. “저에게는 멘토가 없었어요. 그래서 멘토에게 배우면 하루 만에 깨칠 수 있는 것도 5년이 지나서 깨닫게 된 적도 있어요. 예를 들어 노래를 할 때 녹차를 마시면 안 돼요. 입이 마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전 그것도 모르고 노래하기 전에 녹차 마시는 게 습관이었요. 이런 시행착오가 생기지 않게 선배가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출연을 결심했죠.”

멘토로서의 경험은 신승훈이 제작자로 나선 계기로도 작용했다. 2015년 맥케이의 ‘엔젤 투 미’라는 곡을 프로듀싱했고, 2017년엔 로시라는 신인을 발굴해 자기 회사의 소속 가수로 데뷔시켰다. 둘 다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신승훈은 후배들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이 넘쳤다. “로시를 명실공히 유명한 뮤지션으로 만들 거예요. 곧 로시의 발톱을 보게 될 겁니다.” 로시는 “신승훈 대표에게 3년 동안 일대일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항상 친절하고 세심했다”며 “특히 연습실에 무대를 설치해놓고 공연장에서 실제로 부르는 느낌을 갖도록 트레이닝을 시켰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2013년 11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더 신승훈 쇼-그레이트 웨이브’. 도로시컴퍼니 제공
2013년 11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더 신승훈 쇼-그레이트 웨이브’. 도로시컴퍼니 제공
■ ‘분신 같은 음악’ 30주년 앨범 발매 신승훈은 지난 16일, 30주년 기념 앨범의 수록곡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선공개했다. “살아보니 제목 그대로 이 또한 지나가더라고요. 당시엔 그렇게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기억도 안 날 정도로요.” 물론 신승훈도 이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슬럼프도 겪었다. “2003년 당시 비욘세의 ‘크레이지 인 러브’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전 그 노래를 몰랐어요. 곡이 잘 안 나와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음악을 증오하고 싸운 시기였죠. 2년간 어떤 음악도 안 들었어요. 나중에 2년치 음악을 몰아 듣느라 힘들긴 했지만 다 지나갑니다.”

다음달 8일 발표할 30주년 기념 앨범엔 신곡만 8곡이 실린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지 않겠다는 결의다. 이번 앨범에도 신승훈표 발라드 특유의 슬프지만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애이불비’ 정서가 깔려 있다. “제가 김소월 시인을 좋아해서 꾸준히 ‘애이불비’를 모티브로 삼았죠. 이번 앨범에도 ‘슬프지? 내가 더 울려줄게’라고 말하는 곡, ‘슬프지? 그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라고 말하는 곡 등 슬픔을 각각 다르게 표현한 곡이 실려 있어요. 다만 제 노래는 주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라 일의 스트레스, 육아의 고됨을 느낄 때 술 한잔 하고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곡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삶의 위안이 될 노래도 만들었습니다.”

신승훈. 도로시컴퍼니 제공
신승훈. 도로시컴퍼니 제공
■ 30년을 돌아보며…앞으로 10년은? 30년 음악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는 뭘까. 그는 의외로 2008년 발표한 앨범 <라디오 웨이브>에 수록된 ‘나비효과’를 뽑았다. “발라드곡이지만 기존의 색깔과 너무 달라 걱정을 많이 했어요. 발표 전 후배들에게 들려줬는데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대중의 반응도 별로 좋지 않았죠.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예요.”

그렇다면 수많은 히트곡 중에 스스로 꼽는 대표곡은 뭘까. “기록만 놓고 보면 ‘보이지 않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을 받았지만 콘서트에서 단 한번도 안 빼고 부른 노래는 ‘그 후로 오랫동안’인 걸 보니 이 노래가 제가 꼽는 대표곡이겠네요.”

신승훈은 30년의 음악 인생을 “가수에서 뮤지션으로 거듭났던 시간”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진 않는단다. “30년 동안 잘 못하진 않았던 거 같아요. 2년 반에 한번꼴로 꾸준히 앨범을 냈고 의리 있는 팬들도 얻었으니까요. 조용필 형님이 가요계의 거장이자 아티스트죠. 저는 아직 멀었어요. 앞으로의 시간은 아티스트의 길에 다가가는 데 쏟고 싶어요.”

신승훈은 자신에겐 ‘소명’이 있다고 했다. “‘렛잇비’나 ‘예스터데이’처럼 가사가 단순해도, 뜻을 잘 몰라도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공감을 얻고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이미 ‘꿈’은 이뤘고, 이제 ‘소명’을 다할 때입니다.”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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