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 작가의 대작 <설매>의 일부분. 먹구름처럼 선염이 번진 화면에서 별이나 눈발처럼 매화 송이가 거친 가지에서 피어오르는 장관을 형상화했다.
눈처럼 포근한 꽃송이가 암울한 화면 위에 피어오른다. 제멋대로 뒤틀린 가지의 성긴 표면과 먹구름처럼 멍울진 허공에서 겨울의 터널을 뚫고 솟아오른 매화다. 매화 송이들은 역경을 헤치고 태어난 존재들이지만, 윤곽선이며 질감은 소담하고 부드럽게만 보인다. 이렇게 오묘한 이미지를 안겨주는 작은 꽃송이들이 5m 넘는 큰 화폭 위를 수놓는다. 억세고 기운찬데, 한편으로는 온화함이 배어나오는 풍경이 보는 이의 눈을 어루만진다.
서울 북촌 갤러리 아트링크에 여성화가 이동원(45)씨가 내놓은 <설매>(2020)는 희망이 깃든 온기와 다부진 결기가 함께 녹아든 겨울 끝 매화 그림의 진경을 보여준다. 호분을 섞어 물감과 함께 표현한 매화 꽃송이들은 아교를 발라 먹이 아롱진 이미지를 몽글몽글하게 빚어낸 화면 속에서 환상적인 구도로 표현된다. 옛 선인들이 그린 매화도와는 다른 현대적 감각미를 뿜어낸다. 눈발 속 매화 등걸과 매달린 꽃잎들이 어우러져 매향이 풍기는 듯한 느낌이 일어난다. 이 그림을 포함해 지난주 아트링크에서 20여점의 크고 작은 매화 그림으로 시작한 그의 근작전에는 ‘분토설향’(紛吐雪香)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고난 속에 매화꽃을 피워내다’는 뜻의 사자성어 제목은 그가 내놓은 출품작 20여점의 주제를 직감할 수 있다. 이면에는 지난 20여년간 매화 그림에 몰두해 현장 사생과 고금의 문헌·그림들을 섭렵해온 각고의 수련을 암시하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동양회화의 기운 생동한 정신을 좋아했어요. 그중에서도 옛 매화 그림의 매력에 더욱 심취했지요. 국내 전각의 대가인 고 고재식 선생한테서 1996년부터 서예를 배우며 기본을 닦고 2004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묵매화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매화 그림을 6년간 독학했는데, 전혀 진전되지 않더군요. 2010년 한국화 대가이신 우현 송영방 선생을 만나 함께 공부하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옛 화보를 보거나 이론서를 습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직접 섬진강 가나 일본 등지로 가서 매화를 오랫동안 사생했다. 고금의 매화 시 관련 문헌과 대가들의 대표작을 실제로 보고, 구도·기법에 대한 우현 선생의 가르침을 함께 익히면서 10년 화력을 닦았다. 아직 매화 그림의 본령을 깨달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최근 색다른 수련의 성과물도 내놓기 시작했다. 2018년 펴낸 화첩인 <매화희신보>(헥사곤)가 그런 결실이다. 송나라 때 송백인이 매화 그리는 법을 판화로 간행한 <매화희신보> 도상을 일일이 수묵회화로 풀어 재해석하며 내놓은 것이다. 전시장엔 <매화희신보>에 들어간 아담한 크기의 다채로운 매화 군상을 마른 갈필과 물기 흥건한 윤필을 모두 구사해 100점 넘게 내걸거나, <설매>처럼 역경 속에 핀 매화의 난만한 개화를 보여주는 그림들을 걸었다. 매화 그림을 “내 가슴과 생각의 언저리에 오랫동안 맴돌며 쌓였던 것들을 넓은 도량으로 담아주는 이야기의 언어”라고 말하는 작가는 현대화 기법과 옛 작품 공부, 현장 사생을 지속하며 매화 그림의 새 경지를 찾는 고행을 계속 감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4월1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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