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5일 전시장에서 만난 박영숙 사진가. 지난해 찍은 출품작인 <그림자의 눈물 16> 앞에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흠모하는 여성주의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를 비롯한 여성들의 사진과 부친이 물려준 외제 카메라 등이 제주 곶자왈 숲의 이끼 낀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작품의 공간 구성이 눈길을 끈다. 작가의 취향과 개인적인 기억의 흔적들이 섬의 독특한 자연 풍광 속에서 색다른 구도로 다가온다.
국내 여성주의 사진의 대모로 불리는 박영숙(79) 사진가는 3년 전부터 제주 섬에서 소녀처럼 ‘소꿉놀이’를 벌여놓으며 풍경을 찍는 재미에 빠졌다. 두 달에 서너번씩 찾아가 섬 특유의 무성한 숲지대인 ‘곶자왈’ 안을 누빈다. 맘에 드는 숲 한구석에다 소중하게 간직해온 개인 물건이나 음식, 사진, 옷, 천, 유리알 등을 늘어놓고 감상한 뒤 사진을 찍는 것이다.
제주 전역의 바닷가와 중산간 사이에 흩어진 숲지대인 곶자왈은 숲이란 뜻의 ‘곶’과 자갈과 바위, 돌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자왈’, 두 낱말로 나뉘는 제주 사투리다. 제주 사람들한테는 ‘쓸모없는 땅’ ‘가기 꺼림칙한 땅’ 등의 기피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그는 달랐다.
“2015년 제주돌문화공원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곶자왈을 처음 들어가보게 됐어요. 입구를 찾기 어렵고 빛도 안 들고 음습했는데, 들어가니 편안했고 갑자기 무한한 느낌이 확 왔어요. 홀딱 반했죠. 불현듯 떠오른 게 중세 이후 서양에서 종교재판으로 희생된 마녀들이었어요. 그들의 혼백이 여기로 건너와 살림 꾸리며 산다는 상상이었죠.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했는데 2016년 저지리 곶자왈을 촬영하러 갔다가 잘 안 풀려 머플러를 획 바닥에 팽개쳤거든요. 그 이미지가 너무 좋은 거예요. 갈 때마다 다른 소품을 내려놓으며 소꿉놀이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었죠.”
박 작가가 지난 3년간 찍은 곶자왈 소꿉놀이 사진들은 지난주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시작된 신작전 ‘그림자의 눈물’에서 만날 수 있다. 섬 곳곳의 거대한 곶자왈 공간에서 놀이와 작업을 뒤섞어 빚어낸 연작 사진 30여장 가운데 18점을 추렸다.
전시장 풍경은 그로테스크한 무대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연작들은 간신히 햇살이 비껴드는 덩굴숲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소품들의 이미지를 심는다. 흰 가림막 천과 작가가 입었던 낡은 웨딩드레스가 치렁치렁한 나무들 사이에 걸려 팔랑거리거나 음식이 담긴 그릇과 와인잔, 유리구슬과 편지 등이 이끼 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광경이 지나쳐 간다.
전시장의 주요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2019년 작 <그림자의 눈물 3>. 숲속의 빛이 내비치는 공간에 작가가 옛적 결혼할 때 입은 웨딩드레스와 흰 천들을 내걸었다.
평소 흠모하는 여성주의 작가 루이즈 부르주아를 비롯한 여성들의 사진과 부친이 물려준 외제 카메라 등이 곶자왈 숲 여기저기 흩어진 채 연출된 일부 연작은 자연과 개인사가 뒤섞인 구성을 보여준다. 작가의 취향과 개인적인 기억의 흔적이 섬의 독특한 자연 풍광 속에서 서로 녹아들며 관객에게 저마다 다른 연상을 일으킨다.
‘그림자의 눈물’ 연작이 줄곧 암시하는 마녀들의 흔적은 그가 1988년 ‘우리 봇물을 트자―여성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전에 출품했던 마녀 연작과 뿌리가 닿아 있다. 코스모스가 있는 풍경과 마녀로 분한 여성의 모습을 포토 몽타주 방식으로 조합해 중세의 마녀를 20세기 현실로 소환한 <마녀 1988>이 바로 그 작품이다. 작가가 페미니즘 사진 형식을 구축하는 계기가 된 대표작인 이 작품이 최근 곶자왈 연작의 상상력으로 이어졌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박씨는 억압받는 일상 속 여성의 얼굴과 몸 등을 1999~2006년 진행한 <미친년> 연작에서 다양한 연출 사진으로 부각했다. 이와 달리 여성들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이번 신작들은 제주 자연 속에서 소꿉놀이 형식을 통해 작가 자신의 여성성을 관조한다. 더불어, 마녀로 몰렸던 역사 속 여성들의 해원까지 포괄하는 방대한 기획의 성격도 띠고 있다. 작가는 1992년부터 민중미술 계열의 ‘여성미술연구회’에 가입해 페미니즘 문화운동에 앞장섰고, 2007~2018년 사진 전문 화랑인 트렁크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다.
지난 25일 머리칼을 보랏빛으로 염색한 채 전시장에 나온 작가는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 자신의 여성성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는 작업 언어를 발견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아직도 곶자왈의 소꿉놀이에 새롭게 가져갈 소품 목록이 수두룩해요. 오래도록 제주를 오가며 전시와 사진집 작업을 이어나가려고요.” 6월6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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