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풀숲에서 대치하는 남북 병사들의 소총을 대비시킨 선무 작가의 포스터 신작.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색종이를 칼로 오려 붙인 전지 포스터 작업으로 분단과 남북한 현실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냈다.
200장 넘는 울긋불긋한 포스터들엔 구호 대신 탈북자의 뒤섞인 기억들이 넘실거렸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을 업고 불어난 강물을 건너던 고향 어른들과 먹고살기 위해 산속의 나무껍질을 벗기던 탈북 직후의 참상, 국화꽃 무더기 속에 아롱거리는 북한 마을 길과 광주 망월동 기념탑…. 탈북 뒤 20년 동안 작가가 겪은 인생살이와 생각들이 켜켜이 엉킨 이미지들이다.
2000년대 초 탈북해 들어온 뒤 미대에서 현대회화를 공부하고 2007년 데뷔전을 하며 전업 화가가 된 선무(49)씨의 신작전시는 색종이 군집포스터라는 형식이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성미산로 길가에 있는 씨알콜렉티브 전시장에서 지난달부터 열린 20번째 개인전 ‘나의 평화를 말하다’에는 붓질 대신 커터칼로 색종이 조각들을 일일이 잘라 붙여 탈북 전후부터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삶의 단편들, 생각과 갈망, 몽상 따위를 표현한 이른바 ‘전지’ 포스터 작품 200여점이 나왔다.
서로 다른 국호와 색깔을 쓰지만 영문 명칭은 동일한 남북한 체제의 현실을 옮긴 포스터 작품.
전지 그림은 원래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무속 등 제례에 쓰기 위해 종이를 오려 만들던 전통 장식공예의 일종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전통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창작 욕구의 산물에 가까워 보인다. 붓질한 그림보다 섬세한 형상과 치밀한 구도로 개인사와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까닭이다. 포스터와는 별개로 나뭇조각들에 ‘압록강’ ‘두만강’ ‘행복’ ‘사랑’ 등의 문구를 칼로 새겨 들머리에 들여놓은 나무 명함장도 비슷한 맥락의 작품이다. 실제로 작가는 출품작들이 커터칼로 자르고 붙이는 과정을 도 닦듯 되풀이하며 나온 것들이라고 했다.
“지난해 봄부터 올해 봄까지 경기도 화성 대부도 경기창작센터에 처박혀서 색종이 자르고 오려 붙이는 작업만 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화구를 들고 왔다 갔다 하기가 어려워서 가끔 했던 색종이 작업을 일단 하자 했던 건데, 해보니 재미가 있어요. 북한과 중국, 동남아를 떠돌다 정착한 나의 존재와 고향의 풍경을 생각하고 남북한의 현실도 이것저것 짚어보면서 말이죠. 그저 칼질 자체가 20여년간 살아온 제 삶과 남북한 현실을 성찰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광주 망월동 묘지의 5·18 기념탑을 배경으로 한 신작 포스터 작품. 국화꽃들이 탑 주위에 흩날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세 영역으로 나뉘어 선보이는 포스터들은 북한 사회주의 포스터 디자인을 기본 틀 삼아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꽃무늬 등의 그래픽 요소를 추가하면서 남북의 사회 현실과 분단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들을 이야기한다. 휴전선 풀숲에서 대치하는 남북 병사들의 소총을 대비시키거나 붉은빛 푸른빛 바탕인 색면에 남북의 서로 다른 한글 국호와 동일한 영문 국호를 대비시킨 작업은 특히 인상적이다. 남과 북의 서로 다른 별 모양과 대학 명칭, 지명들이 충돌하면서 얽힌 모습과 고향길 여기저기 국화꽃 송이들이 한가득 날리는 풍경 등이 겹쳐지는 포스터의 도상들도 등장한다.
획일적인 북한 선전예술의 형식 틀 위에 남한에 와서 작가가 갖게 된 현대미술의 상상력이 얽혀든 포스터들은 그의 내면에 혼돈과 아픔, 불안이 계속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열망, 이런 꿈을 가능하게 해주는 남북 사람들의 화해와 공감에 대한 기원 등도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일부러 예리한 칼을 골라 작업했어요. 칼로 미세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자르듯 정확하게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평화를 원한다고, 북녘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고….” 3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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