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메 콰르텟은 결성 2년 만인 2018년 ‘위그모어홀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콰르텟(현악사중주)은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깼다. 왼쪽부터 배원희, 허예은, 김지원, 하유나. 크레디아 제공
“우리 콰르텟 한번 해볼까?”
2016년 어느 날, 바이올리니스트 배원희의 제안에 독일에서 공부하던 김지원(비올리스트)과 허예은(첼리스트)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던 하유나(바이올리니스트)는 그날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글쎄, 왜 그랬지? 그저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하하하.” (하유나) 최근 <한겨레>와 만난 현악사중주단 ‘에스메 콰르텟’은 당시의 호기로움을 떠올리며 쉼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이들은 “세계 최고가 되자”, “콩쿠르를 휩쓸자” 따위의 큰 계획을 세운 건 아니다. 배원희는 말했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현악사중주단을 만들고 싶었어요. 프로 중에는 (아마도) 없거든요. 그걸 우리가 한번 해보자. 그래서 진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그런 ‘한마음’이 무기였을까. 에스메 콰르텟은 결성 직후부터 각종 콩쿠르를 휩쓸기 시작했다. 데뷔 2년 만인 2018년엔 세계 최고 권위의 ‘영국 런던 위그모어홀 국제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2년밖에 안 된 신생팀이었으니 다들 놀랐죠. 우리도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이게 뭐지? 하며 놀랐으니까요. 하하. 당시 2등 팀은 데뷔한 지 10년 된, 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유명 매니지먼트 소속 팀이었어요.” (하유나) 이후 여러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오는 등 에스메 콰르텟은 그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6월9일 리사이틀을 하는 에스메 콰르텟. 왼쪽부터 배원희, 하유나, 김지원, 허예은. 크레디아 제공
처음 결성할 때만 해도 “과연 될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현악사중주단은 전통적으로 백인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긴 역사를 가진 빈 필하모닉 등 유명 오케스트라에서도 여성 단원을 받은 건 (역사에 견주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실내악에서도 여성 연주자에게 기회가 늦게 온 거라 생각해요.” (배원희) 보수적인 클래식계에서 출산과 육아를 감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기 힘들었을 터다. 그래서인지 다들 모인 지 고작 2년밖에 안 된 ‘동양인 여성들’이 해낼 거란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이들은 “콰르텟에 대한 편견을 깨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가장 기쁘다”고 했다.
고국인 한국에선 자신들이 성취한 결과에 관해 관심이 덜한 것이 서운할 법도 하다. 조성진이 ‘쇼팽콩쿠르’ 1위를 한 후 한국에서는 ‘조성진 열풍’이 불었다. 위그모어홀 콩쿠르 우승은 그 권위에서 쇼팽콩쿠르 우승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실내악이라는 장르 자체를 대중적으로 만드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 같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외국 클래식 시장에서 실내악은 이미 활성화됐다. 학생들이 실내악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잘 마련돼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솔로나 오케스트라 단원을 목표로 삼는다. 하유나는 “클래식을 공부하는 많은 ‘여학생’이 나아갈 또 하나의 길을 개척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지원은 “오래 한 팀은 콰르텟을 30~40년씩 한다. 반짝인기에 관심 두지 않고 실내악의 매력을 꾸준히 오랫동안 알리고 싶다”고 했다.
왼쪽부터 김지원, 배원희, 허예은, 하유나. 크레디아 제공
기회는 많다. 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데뷔 리사이틀도 그 기회 중 하나다. 그간 여러 무대에 서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정식으로 리사이틀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친숙하면서도 실내악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을 고심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현악사중주 작품인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슈만 현악사중주 1번, 진은숙의 현악사중주 곡인 ‘파라메타스트링’ 등을 들려준다. “슈만은 우리에게 도전과 같은 곡이에요. 내밀한 감정 표현이 어렵지만 현악사중주의 매력을 느끼기 좋은 곡이죠.” (하유나) 에스메 콰르텟은 곡의 느낌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표정과 가벼운 고갯짓 등에서도 세밀한 감정을 드러낸다. 허예은은 이렇게 말했다. “실내악을 꿈꾸고 있다면 무대에서 감정 표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요. 한국 학생들은 내 표현이 정답이 아닐까 봐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아요. 느낌엔 정답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에스메’는 프랑스 고어로 ‘사랑받는’이라는 뜻이다. 에스메 콰르텟의 분위기는 그 이름과 닮았다. 함께 있으니 주체할 수 없는 밝은 기운이 퍼진다. “수다 떠느라 연습을 못 할 때도 있을 정도”(허예은)란다. 콰르텟에서 중요한 덕목이 팀워크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네 명의 정말 다른 사람이 합을 맞춰 하나의 무대를 이룬다는 행복감은 정말 커요. 서로 눈 맞추며 연주할 수 있다는 건 큰 힘이죠.” (배원희) 6월엔 에스메 콰르텟과 함께 실내악의 매력에 푹 빠져보자.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