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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설악산 화가 김종학, 망망대해 같은 60년 그림인생

등록 2020-06-01 18:03수정 2020-06-02 02:34

42살에 돌연 설악산 칩거
구상화 속 추상의 자유정신
전통 회화의 아취 더해
색채화의 대가로 우뚝

“자식들 부끄럽지 않게
100점만 그리고 죽자…
설악산 자연을 그렸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대표작품인 <팬데모니움>(Pandemonium). 세로 10m, 가로 6m에 이르는 이 대작은 온갖 꽃과 풀, 새가 뒤엉킨 대자연의 화엄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전시를 앞두고 올해 만든 신작이란 점에서 노령에도 왕성한 작가의 창작열을 짐작게 한다. 작품의 크기 때문에 걸개그림처럼 공간에 세워 바닥으로 늘어놓는 전시방식을 택했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대표작품인 <팬데모니움>(Pandemonium). 세로 10m, 가로 6m에 이르는 이 대작은 온갖 꽃과 풀, 새가 뒤엉킨 대자연의 화엄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전시를 앞두고 올해 만든 신작이란 점에서 노령에도 왕성한 작가의 창작열을 짐작게 한다. 작품의 크기 때문에 걸개그림처럼 공간에 세워 바닥으로 늘어놓는 전시방식을 택했다.

“헤어져요.” 1979년 10월, 한국에서 걸려온 부인의 전화는 그의 그림과 삶을 뒤흔들었다. 미국 뉴욕에 유학을 와 대가들 전시에 심취하며 습작에 열중했던 42살 작가 김종학은 허겁지겁 귀국했다. 어린 딸과 아들을 두고 무작정 떠났다가, 불화가 싹튼 배우자한테 이혼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이혼 뒤 모든 걸 버리기로 작심하고 설악산에서 칩거를 시작했다. 산기슭 작업실에서 낮에는 풀숲을 뒤적이며 꽃과 ‘날아가는 꽃’인 새들을 만났다. 밤에는 별과 달을 쳐다봤다. 그는 “자식들 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된 그림 100점만 그리고 죽자며 마음을 고쳐먹고, 설악산 사철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이젠 화랑가에서 그의 등록상표가 된 설악산 동식물의 울긋불긋한 원색 풍경화는 그렇게 싹텄다. 귀양지라 생각했던 설악산에서 사생한 자연의 변화 모습은 유일무이한 소재이자 위안이 됐다.

1부 ‘전통과 아방가르드’에 나온 작가의 1964년 작 &lt;추상&gt;. 서구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 전통 서예의 획을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이고 거친 선들이 화면에 도드라진다.
1부 ‘전통과 아방가르드’에 나온 작가의 1964년 작 <추상>. 서구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 전통 서예의 획을 떠올리게 하는 역동적이고 거친 선들이 화면에 도드라진다.

작가는 정선, 김홍도 같은 전통 거장처럼 머릿속에 풍경을 담아놓고 화폭에서는 자기 식으로 구도와 색감을 바꿨다. 그리는 방식도 과거 몰두한 추상 그림과 실험미술 작업하듯이 했다. 칠하는 게 아니라 물감을 툭툭 던지듯 입히고,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물감 덩어리를 으깨어 바르고 휘저었다. 형식과 내용에서 하나로 틀 잡을 수 없는 화풍을 빚어냈다. 부인과의 작별은 서구 추상 사조, 전위 미술의 흐름을 주시해온 1960~70년대 청장년기 작업과도 작별하게 했다. 하지만 구상화로 틀었어도 추상의 자유정신과 전통회화의 아취는 사라지지 않고, 꽃·풀·새로 대표되는 색채 회화의 원형질로 남게 된다.

5월 초부터 부산시립미술관 3층에서 열리고 있는 원로화가 김종학(83)의 회고전은 개인사의 풍상과 파란만장한 작업 내력을 삭이면서 색채화 대가로 우뚝 선 60여년 화력을 온전히 드러낸다. 미국 연수 중단과 귀국, 설악산 칩거가 이어지며 추상에서 자연 풍경으로 바뀐 대가의 작품을 설악산 시대의 전후를 기점으로 갈라 보여준다.

김종학 작가가 뉴욕 시절인 1978년 그린 유화 소품 &lt;남자&gt;. 그는 추상과 구상을 포함한 다양한 사조가 공존했던 뉴욕 화단에서 서구미술의 흐름을 한껏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려진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침침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확실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힘겹게 유학생활을 했던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김종학 작가가 뉴욕 시절인 1978년 그린 유화 소품 <남자>. 그는 추상과 구상을 포함한 다양한 사조가 공존했던 뉴욕 화단에서 서구미술의 흐름을 한껏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려진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침침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확실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힘겹게 유학생활을 했던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박진희 학예사는 추상과 실험미술, 전통화의 계승 같은 작가의 예술 사유가 40여년째 지속한 설악산 그림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렇게 형성된 화풍의 핵심은 무엇인지를 초기작과 드로잉, 목기·민예품 등을 통해 알려주는 전시 틀을 짰다. 열쇳말은 옛것에서 새것을 찾는 ‘법고창신’과 전통회화의 요체인 ‘기운생동’. 10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엔 설악산 그림만 계절별로 조명했으나, 이번 전시는 딸 김현주씨의 노력으로 60~70년대 초창기의 추상·설치 작업이 1부 ‘전통과 아방가르드’에 처음 소개되면서 김종학의 화력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을 꺼낼 수 있었다. 50년대 말 미대 시절 그린 <여인>과 서예의 필획을 방불케 하는 64년 작 <추상> 같은 앵포르멜(형상이 불명확한 뜨거운 색조의 추상화) 작업과 <역사> 등의 지성적 판화 작업이 우선 눈길을 붙든다. 1960년대 말 일본에서 상자와 상자 사이의 꼬인 광목천으로 보여준 실험미술 설치작품도 전시장에 재현됐다. 77~79년 미국 작업 시절 수묵화, 드로잉, 유화 등 다양한 기법으로 펼친 추상·구상 작품도 처음 선보였다.

1부의 딸림 섹션인 1-2 ‘실험 설치미술’에 나온 작가의 1970년 작 &lt;무제&gt;. 서로를 잇는 선이 꼬인 두 개의 상자를 보여주면서 사물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설치작품이다. 도쿄 무라마쓰 화랑의 전시회에서 선보였는데, 당시 &lt;요미우리신문&gt;은 리뷰기사를 실어 “남북한의 긴장 상태를 표현한 것 같다”고 평했다.
1부의 딸림 섹션인 1-2 ‘실험 설치미술’에 나온 작가의 1970년 작 <무제>. 서로를 잇는 선이 꼬인 두 개의 상자를 보여주면서 사물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설치작품이다. 도쿄 무라마쓰 화랑의 전시회에서 선보였는데, 당시 <요미우리신문>은 리뷰기사를 실어 “남북한의 긴장 상태를 표현한 것 같다”고 평했다.

하지만 전시의 중심축은 설악산 40년 작업 여정을 정리한 2부 ‘신―산.수.화’와 3부 ‘법고창신’, 4부 ‘자연의 골격―진경’이다. 먼저 등장하는 건 설악산 풀꽃의 정경을 현란한 색감과 보색대비로 그린 <여름> 등의 색채 회화다. 이어 극도로 단순화한 폭포와 고적한 나뭇가지, 새를 대비시킨 문인적인 그림 등을 거쳐 겨울철 골산의 윤곽만을 단색조로 드러낸 전통 진경산수화풍 작품으로 이어진다. 익히 알려진 색채화 범주를 넘어 무구한 자연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작가가 일관되게 힘써왔음을 새롭게 부각한 셈이다.

폭포 물줄기를 배경으로 수평으로 가냘픈 가지를 치고 한 마리 새가 앉은 모습을 그렸다. 18세기 그림 대가 현재 심사정의 새 그림을 단박에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유유자적하고 고독한 작가의 심사를 드러낸 득의작으로 비친다.
폭포 물줄기를 배경으로 수평으로 가냘픈 가지를 치고 한 마리 새가 앉은 모습을 그렸다. 18세기 그림 대가 현재 심사정의 새 그림을 단박에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유유자적하고 고독한 작가의 심사를 드러낸 득의작으로 비친다.

정점은 5부 ‘기운생동으로’다. 천장과 벽, 바닥이 온통 검은빛으로 뒤덮인 방에 세로 10m, 가로 6m의 대작 <팬데모니움>이 천장부터 땅바닥까지 늘어뜨려진 채 빛난다. 전시를 앞두고 작가만의 힘과 내공으로 온갖 꽃과 풀, 새가 뒤엉킨 대자연의 기운 생동한 화엄 세계를 펼쳐놓았다. 대작 뒤편엔 어선의 불빛인 ‘어화’가 일렬로 비치는 부산 밤바다를 담은 검푸른 대형 화폭(가로 8m, 세로 3m)이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내걸렸다.

감상은 대작들로 끝나지 않는다. 조형적 안목의 밑천이 된 6부의 목기·민예품과 그의 회화적 변모를 6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드로잉 100여점으로 압축한 7부 ‘쉼없는 탐구’까지 관객들은 망망대해 같은 김종학의 그림 세상을 지루할 겨를도 없이 내달리게 된다. 6월21일까지.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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