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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돌아온 민중가수 이지상…“천천히, 순하고, 뜨끈하게 늙자”

등록 2020-06-04 17:42수정 2020-06-05 02:04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만든 이
6집 ‘나의 늙은 애인아’ 발표

낙관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에 둔감하지 않게
늙어가겠다는 다짐

낮고 그늘진 곳 향하는
그의 노래는 끝끝내 의연

‘늙음’을 인정하는 순간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최광임 시인의 시 ‘덕산기로 가자’를 읽을 때였고, 문장 하나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나는 늙기 시작했’다. 이 단순하고 메마른 문장 앞에서 반백이 넘은 사내는 지난날과 앞으로의 시간을 떠올렸다. 흩어진 세월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고, 앞으로 허락된 시간은 가늠되지 않았다. “나이를 먹다 보면, 늙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때가 불현듯 찾아옵니다.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고, 반성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요.” 지나온 삶이 아쉬울수록 앞으로의 다짐은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노래는 움트듯 피어났다.

가수 이지상이 5년 만에 내놓은 6집 앨범 <나의 늙은 애인아>에는 삶에 대한 낙관을 잃지 않으면서도 역사와 시대에 둔감하지 않게 늙어가겠다는 그의 다짐이 담겨 있다. “‘천천히, 순하고, 뜨끈하게’ 늙어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런 그의 마음은 최광임의 시에 가락을 입힌 표제곡 ‘나의 늙은 애인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나의 늙은 애인아/ 볕 좋은 지붕 위 고양이처럼 순하게 늙어가자// 아우라지 장터국밥 한 그릇처럼 뜨끈하게 늙어가자//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늙어가자”

이지상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민중음악계에서는 유명한 가수다. 1990년대 대학가에서 즐겨 불리던 ‘통일은 됐어’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 등이 그의 노래다. 양희은과 안치환이 각각 다시 부른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도 본래는 그의 작품이다.

지난 세월, 그의 노래는 당대의 아픔을 정조준했다. “일본군 ‘위안부’(‘사이판에 가면’), 베트남 양민 학살 희생자(‘베트남에서 온 편지’), 일본의 민족학교 아이들(‘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효순이 미선이(‘겨우 열다섯’),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편지’) 등에 관한 노래들을 썼지요.” 불의에 희생되거나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을 노래로 고스란히 꿰어온 것이다. 다만, 낮고 그늘진 곳을 향하는 그의 노래는 끝끝내 의연하다.

이번 앨범도 다르지 않다. ‘그 쇳물 쓰지 마라’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해마다 끝없이 반복되는 노동자 사망 사고에 주목한다. 충남 당진의 한 제철소에서 20대 노동자가 작업 도중 용광로에 빠져 숨진 2010년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댓글 시인’ 제페토가 쓴 시에 노래를 입혔다.

“그 쇳물 쓰지 마라/ 자동차도 가로등도 바늘 한 개도 만들지 마라/ 젊은 청춘의 뼈를 녹인 쇳물이다/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착한 조각가가 얼굴을 흙으로 빚어 그 쇳물 부어 공장 정문에 세워두라/ 가끔 엄마가 찾아와서 내 새끼 잘 있느냐 얼굴 한번 쓰다듬다 돌아가게…”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의 질곡과 고려인·독립운동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도 담았다. ‘윤치호에게 쫓겨난 소녀’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블라디보스톡’ ‘저 나무―시베리아 동토에 새긴 이름들’에서는 역사와 시대에 무뎌지지 않게 늙어가겠다는 그의 각오가 묻어난다. ‘두근두근 그 노루’와 ‘새의 날개는 대신 달아주지 않는다’를 통해서는 분단과 평화를 이야기한다. 시·노래 모임 ‘나팔꽃’에서 활동하며 시를 노래해온 그는 이번 앨범에서도 최광임을 비롯해 채광석, 도종환, 박일환, 김진경 시인의 시를 노랫말에 담았다.

‘영원한 비주류’라고 자임하는 이지상의 음악 인생을 관통하는 화두는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안도현 시인의 ‘철길’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에게 ‘사람이 사는 마을’은 어떤 곳일까. “이웃의 아픔을 등한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고통이 부딪치면 조금 망설이긴 하겠지만 결국에는 타인의 고통에 마음을 주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날까지, 그의 노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천천히, 순하고 뜨끈하게.’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사진 ‘사람이 사는 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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