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관객을 찾아가는 공연을 하고 있는 뮤지션 시와가 지난 5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은유 작가를 1인 관객으로 맞아 ‘당신을 위한 진짜 작은 콘서트-노래 속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종종 찾아가는 길상사(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서 평소 앉아 쉬던 자리의 반대쪽에 앉았다. 늘 앉아 있던 자리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못 보던 것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가사와 멜로디를 잊지 않으려고 휴대전화에 녹음하고 흥얼거리면서 집에 왔다. 그렇게 만든 노래가 ‘랄랄라’(2007)다. 홍대 라이브클럽 ‘빵’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해 “들여다보고 안아주는 노래”들로 꾸준히 사랑받으며 어느덧 14년차 뮤지션이 된 시와. 그가 이번에도 슬쩍 위치를 바꿔보았다. 무대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관객이 편히 여기는 장소로 찾아가기로. 단 한명이 원해도 간다. 공연료는 신청한 사람이 형편껏 내면 된다. 이렇게 시도한 자리가 ‘당신을 위한 진짜 작은 콘서트―노래 속의 대화’다.
이는 코로나 시대에 맞춰 급조된 이벤트가 아니다. 본래 속닥이듯 대화하는 느낌의 노래를 불러왔고 “내 노래 듣는 사람을 보는 걸 좋아하는” 뮤지션으로서 그가 품어온 상상 속 공연을 이참에 시도하는 것이다. 색다르고 시와다운, 이 무대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지난 5월20일 서울 연남동의 한 문화공간에서 ‘노래 속의 대화’ 형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낮의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시와는 기타 줄을 고르다가 나의 신청곡 ‘랄랄라’의 첫 음을 뗐다.
“눈물도 말이잖아요”
―와, 나만을 위한 노래를 듣는 게 되게 황홀하네요. 좀 긴장되고 책임감도 들었는데, 제가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어떤 책임감일까요?”
―그동안 공연에서는 수많은 사람 중 한명이었지만 이번엔 나 혼자니까 관객 역할을 잘해야겠다는 마음이랄까.(웃음) 공연을 이렇게 진행하는 거예요?
“네. 현재 마음이 어떤지 제가 질문을 드리기도 하고, 먼저 얘기하시는 경우가 더 많아요. 노래하고 이야기하면서 또 이어지는 노래가 있으면 더 불러드리고. 듣는 분도 ‘이거 들으니까 이 노래 생각나요’ 하시면 그거 또 불러보고. 오늘 어떠셨는지 묻고 저도 이야기하고 헤어져요.”
―물 흐르듯이. 한시간 정도 해요?
“두시간이 훌쩍 가요. 사실 모자라요. 좀 아쉬워요.”
‘노래 속의 대화’는 시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공개됐다. 1차 공연 기간은 5월12일부터 6월12일까지 총 10회. 서울에서 지하철이 닿는 곳으로 장소를 한정해 시와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직접 찾아간다. 관객은 한명부터 최대 여섯명까지 가능하다.
―이런 기획이 코로나19와 상관이 있었나요?
“작년 연말에 처음 생각했고요. 이게 정말로 소규모 공연이다 보니까 비용이 필요해서 한 문화재단의 2020년도 예술기금 지원 사업에 냈어요. 그건 안 됐죠. 이 공연은 지원 사업과 관계없이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연을 못 한다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고, 그만큼 관객이랑 좀 더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컸죠. 코로나를 계기로 공연 계획을 더 가속화한 건 맞아요.”
―공연료를 정하지 않았어요.
“‘시와가 나한테 노래를 들려주는데 이 정도는 줘야지’ 하고 형편상 부담되는 만큼 빼고 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려요. 저도 많이 받고 싶은 마음이 있죠. 그러면 그걸 지불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안전 문제도 그렇고, 이런 방식의 공연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갑자기 생길 수도 있잖아요.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을 거 같아요.
“그냥 다 열어놓은 공연이라서 저는 좋아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와중에 서로 배려한다든가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흐름을 믿어요. 안전 문제도, 제 에스엔에스를 팔로해야 알 수 있는 공연이잖아요. 어떤 경로로든 어렵게 저를 찾아와서 신청한 사람인데 이상한 사람일 리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공연할 때 스태프들이 같이 가요.”
―첫 공연을 유튜브로 봤는데 눈물을 흘리셨어요. 어떤 기분이었어요?
“일단 저는 잘 우는 사람이고요.(웃음) 부끄럽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요. 왜냐하면 눈물도 말이잖아요. 공연을 왜 하게 됐는지 설명하다가 울었던 것 같아요. 저도 ‘내가 이 말을 해도 되나’라는 생각들 때문에 말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주로 듣기만 하고요. 그렇다면 난 언제 이야기를 하는가 생각을 하면 노래로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말하고 싶은 마음으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게 돼요. 그 이야기를 하다가 울컥했어요.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요, 그날.”
―아까 노래 듣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났어요. 저도 잘 우는 편인데,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해요. 우는 게 왜 잘못이죠? 못 우는 게 문제죠.
“맞아요. 못 울어서 잘못되는 일은 있어도 울어서 잘못되는 일은 없어요.”
‘시와’는 지금은 사라진, 그가 좋아했던 작은 가게의 이름이다. 그리움을 담아 지었다. 본명은 강혜미. 1996년에 대학에 입학해 노래패 동아리에 들어갔고 거기서 기타도 배웠다. 덕분에 작곡을 하게 됐다. 졸업 후 특수교육 전공을 살려 교사로 일했는데 재직 중에 특수교사를 위한 음악치료 연수를 몇년간 듣다가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창작의 기쁨’에 눈떴다. 교사 강혜미로 살아가며 조용히 키워온 음악에 대한 열망이 점화된 것은 서른쯤, 홍대 라이브클럽에서다.
―처음에 어떻게 무대에 서게 됐어요?
“원래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어요. 어느 날은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더 바랄 게 없다는 표정으로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날 그 클럽 사장님에게 가서 여기서 노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어요.”
―어떻게 하면 된대요?
“자작곡으로 오디션 보면 된다고. ‘저 노래 있어요’라고 해서 그날 공연한 분이 기타를 빌려줘서 바로 오디션을 봤어요. ‘길상사에서’로. 근데 잘하지 못했겠죠. 연습을 한 게 아니니까.(웃음) 한달쯤 연습하고 한번 더 오디션을 봤는데 안 되고, 결국 두번 떨어지고 세번째에 공연 날짜 잡자고 해서 첫 공연 한 게 2006년 2월이에요.”
그때부터 퇴근 후 저녁과 주말에 클럽 무대에 섰다. 2007년 여름에 <빵 컴필레이션 3. 히스토리 오브 빵(History Of Bbang)> 앨범에 ‘화양연화’를 실으면서 데뷔했다. 당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위한 광화문 촛불 문화제에 서기도 했다. 그렇게 교사와 가수 활동을 4년간 병행하다가 2011년에 가수로 전업했다. 지금까지 <소요>(2010), <다운 투 어스>(Down to earth·2011), <머무름 없이 이어지다>(2014), <다녀왔습니다>(2019) 등 4개의 정규 앨범과 몇개의 싱글 앨범을 냈다. 따스한 음색, 담백한 선율로 내면과 일상을 섬세하게 그려낸 시와의 노래들 중 음원 차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곡은 ‘완벽한 사랑’이다.
나는 두번째 신청곡으로 4집의 ‘여전히 모르겠어요’를 신청했다.
“언젠가 나와 조용히 약속하길 어른이라면 혼자서 감당할 것/ 고민의 시간은 끝낸 후에 밝힐 것 어지러운 생각은 드러내지 말 것/ 그러나 가려야 한다면 거짓은 아닐까 너무 어려워 마음속 일어나는 바람 잠잠해지지 않고 모두 흔들어/ 오해로 가득한 나날이여/ 오늘의 나를 거짓이라면/ 어느 곳에 온전한 내가 있을까.”
대학교 노래패에서 시작한 음악
특수교사로 음악치료 연수 받다
창작의 기쁨 눈뜨며 뮤지션 전업
담백한 선율로 내면 섬세히 노래
거리두기로 힘겨운 공연·예술계
“기본소득” 등 정책적 대안 절실
“노래 만들고 부르는 게 그냥 좋은”
시와의 비접촉 시대 건너는 열망
인디뮤지션으로서 느끼는 벽
―시와의 노래는 가사에 공감이 많이 돼요. 가사는 어떻게 쓰세요?
“그때그때 저에게 크게 인상에 남는 일이 자연스럽게 가사로 나왔어요. 4집은 ‘나를 찾는 여정’으로 주제를 잡고 제 마음의 흐름을 가사로 썼고요.”
―‘여전히 모르겠어요’는 팬들한테도 자기 얘기 같다는 이야기 많이 들으시죠?
“네. 많은 분들이 ‘진정한 내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시와님도 그런 걸 느끼세요?
“제 안에는 여러가지 마음이 들끓고 있고 어떻게 보면 부정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는데 저는 평온한 표정으로 노래를 하는 거죠. 그게 저는 부대끼고. 사실 나 이런 사람 아닌데.”
―막 짜증도 내고 이러는데?
“네, 특히 질투 이런 거.(웃음) 근데 샘 절대 안 내는 사람처럼, 돈 욕심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보살인 것처럼. ‘길상사에서’란 노래로 데뷔하시고.(웃음)
“그러니깐요.”
―질투나 선망 같은 감정이 없을 수 없죠. 창작하는 일을 하는데요.
“이런 모든 결결이 다 있는 사람인데 어쩌면 나는 그렇지 않은 모습만 내보이고. 내가 내 발목 잡은 거지만요.”
―질투 감정은 언제 느끼세요?
“저는 곡을 못 쓰고 있는데, 곡을 못 쓰니까 음반을 못 내고 그런 시기에 어떤 친구는 음반을 내고 반응이 좋아 보이면 부럽고 세상 멋진 사람 같고 난 못 할 것 같고. 내가 내면 저렇게 될까. 근데 그런 감정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어요. 숨겨야 하고 드러내면 큰일 난다. ‘사람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걸 왜 쟤는 잘나 보이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라고 제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죠.”
―시와 안에 도덕 교사가 한명 있네요.
“그런가 봐요. 제 꿈속이 그렇게 맨날 학교예요.(웃음) 왜 맨날 학교 꿈을 꾸지 하고 의아해했는데 언뜻 생각해보니까 내가 정말 지키고 싶은 규율, 규칙이 많구나 싶어요.”
‘노래 속의 대화’가 코로나19 때문에 기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코로나로 가속화”됐다. 시와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연을 못 한다는 불안함이 있었고, 그만큼 관객이랑 좀 더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지금은 괜찮으세요? 감정을 표현하세요?
“괜찮을 수는 없어요. 샘나는 마음 때문에 그거에 사로잡히진 않는 정도 같아요. 결국은 감정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인데 그걸 드러내면 안 돼, 숨겨, 나쁜 거야라고 할 때 오히려 저한테 끼쳤던 해악이 더 많았던 같아요. 그냥 나 부러워, 샘나라고 할 때 휘둘리지 않더라고요.”
―맞아요. 자기 감정으로 타인한테 해를 끼치는 게 문제지 감정 발생 자체가 문제는 아니죠.
“저는 아예 싹을 자르는 게 방법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자를 수도 없고. ‘노래 속의 대화’ 하면서 만나는 분들에게 제가 메시지를 줘도 된다면, 줄 수 있다면 그런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이 생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괜찮다.”
―14년 동안 활동하면서 위기, 슬럼프가 있었을까요?
“그게 어떤 마음이냐면 천장이 있는 것 같아요. 벽이랄까? 인디뮤지션으로서 음반을 내고 잘되면 <이비에스(EBS) 스페이스 공감>에 나가는 것까지의 범위. 그걸 어떻게 보면 그냥 반복하고 있는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거기까지라는 걸 음반을 낼 때마다 경험하는 게 있긴 있어요.”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시와만의 고유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보다 반대로 최소 관객을 만나는 공연으로. 또 어느 순간에는 더 많이 알려지고 싶어 할 수도 있겠죠. 그런 마음이 들 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코로나 시대 예술인의 ‘함께 살기’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땠어요?
“사실 사직서 내면서 못 벌면 안 쓰면 되지 생각했어요. 제가 10년 동안 일했고 퇴직금도 받고 그런 돈들이 바탕이 되니까. 그래도 매달 월세는 안 내도 돼서 없으면 안 쓰고 이렇게 살 수 있죠. 지금 제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해요. ‘네가 버티는 힘은 전세이기 때문이다.’(웃음) 근데 이번에 코로나로 제가 어려워 보이잖아요. 친구들이 막 도와주려고 했어요.”
―어떻게 도와줘요?
“제가 ‘노래 속의 대화’를 한다고 하니까 공연비를 먼저 입금하고 나중에 나아지면 공연하러 오라는 어른도 계셨고. 이 공연을 선물하고 싶다고 입금하는 분도 계셨고. 그런 도움으로 저는 버텨왔죠.”
―소중한 분들이네요. 예술 분야도 양극화가 심해서 가난한 예술가는 목숨을 잃기도 하잖아요. 요즘 더 걱정이에요. 주변에 생계로 고민을 하는 후배들이 있나요?
“네. 있죠. 저는 그래도 싱어송라이터니까 유튜브로 라이브도 하고 온라인 랜선 공연도 해요. 근데 그것도 혼자서 무대를 꾸릴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다른 연주자들은 이럴 때 더 힘들어요. 주변에서 온라인 공연을 기획해서 섭외가 와도 그게 노래하는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거예요.”
―그러네요. 세션 하는 분들은 어떻게 생활하죠? 수입이 없어서.
“그래서 제가 연결했어요. 이번에 재난지원금 받았잖아요. 저를 한번 도와주신 어른이 요새 어떠냐고 또 물어보셔서 저보다 더 어려운 친구가 있다고. 그분이 너무 좋다고, 정부에 기부하기 싫고 진짜 예술인 지원하고 싶다고 해서 소개했어요.”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생각해본 것 있으세요? 다른 분야 종사자들도 힘들던데요.
“기본소득.”
―그렇죠! 기본소득 절실해요. 근데 재난지원금 신청할 때 예술가나 프리랜서는 증빙서류 갖추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어요.
“예술인복지재단과 연계된 예술인 경력정보시스템이 있어요. 거기에 자신이 발표한 작품을 등록하면 예술인 증명이 나오거든요. 경력확인서처럼 나오고. 어린이집에 긴급보육 맡길 때 내는 재직증명서를 그걸로 증명할 수 있대요.”
―아, 그럼 작품이 있어야겠네요.
“세션들도 참여한 음반이 있으면 돼요. 저의 입장에서는 앨범에 크레디트를 정확하게 쓰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아요. 한명도 빼놓지 않고 조금이라도 참여했다면 다 올려야죠.”
‘노래 속의 대화’ 소식을 들은 한 선배는 그에게 말했다. “시와가 정말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일을 생각했구나.” 참말이다. 시와는 뮤지션, 관객 같은 집단으로 묶이는 이름 말고 개별적인 존재가 만나는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했다. 실제로 보청기를 껴서 소리는 듣지만 공연장에 가는 건 엄두를 못 냈다는 한 청각장애인이 공연을 신청했는데, “청각장애인에게 하는 공연이라고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인간 누구누구에게 한다고 생각해달라”고 당부했다. 시와는 “그러려고 이 공연 한다”며 그를 정중히 안심시켰다. 사연은 다채롭다. 새로 이사 간 집의 거실 전망이 너무 좋은데 혼자 보기 아깝다며, 또 아이가 어려서 공연을 보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며 가수를 집으로 초대한다. 뜻밖의 추억도 생겼다. 공연을 마친 시와에게 관객이었던 여자 친구들 넷이서 그의 노래 ‘새 이름을 갖고 싶어’를 불러주는 깜짝 무대를 선보인 것.
―세상에! 눈물 흘리셨겠네요?
“네. 지금도 눈물 나잖아요.”(눈물을 닦는다.)
―아름다운 장면이었을 거 같아요.
“넷이서 서로 파트 나눠서 부르고, 저는 안 해본 화음도 만들어서 넣고.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너무 예쁜 거예요, 그 사람들이.”
늘 있던 자리 건너편에서 바라보니 보이는 삶의 진풍경을 시와는 마음에 꼭꼭 저장 중이다. 그 근사한 기분과 감정은 훗날 노래로 만들어 세상에 돌려보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진짜 작은 공연이 코로나 시대에 생존 양식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은 비대면 비접촉 시대에도 “노래 만들고 부르는 게 그냥 좋아서 노래한다”는 시와의 열망은 식지 않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직접 듣고 싶어 하는 팬들의 지순한 마음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가수와 팬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된 위계와 과잉된 자의식의 예술가라는 익숙한 전제를 뒤집어서 자신의 노래와 향기를 지키는 사람, 시와는 ‘노래 속의 대화’로 생에 다가가는 방법을 입증하고 있다.
※시와의 ‘노래 속의 대화’ 시즌2는 6월1일부터 13일까지 웹페이지(weneedtrees.kr)에서 신청을 받는다.
녹취 홍혜원